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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요 May 05. 2020

평탄한 날의 아이스크림

순탄했던 하루에도 보상은 필요하다.


올해도 끝인가.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천안을 향해 가는 게 아니라, 어디 읍내로 들어가는 트럭을 탄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며 벽에 몸을 뉘었다. 오랜만에 빠른 퇴근이었다. 스크린 속 파란 불빛과 가로등의 주황 불빛만이 밤낮으로 가득 차던 날들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연말이 대체로 바쁘다지만, 올해는 유독 심했다. 다들 화장실을 육상선수처럼 뛰어가고, 자리로 빠르게 돌아와선 고개를 박고 일을 했다. 회사 건물을 벗어나면, 회사원을 공략하는 기름진 곱창 냄새가 풍겨왔고 통유리 너머로 사람들이 앉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같이 퇴근하는 동료와 그 앞에서 눈이 마주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연말이었다. 회사 주변은 어둠을 몰랐다. 회사 밀집 지역이 불철주야 빛난다지만, 그 밑의 거리들까지 가세하니 눈이 다 피로했다. 한 달째 알전구들이 거리에서 번쩍였다. 위고 아래고 너무 밝아, 백야현상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아이슬란드에서 백야현상을 보겠다던 친구에게 구로로 오라고 얘기하고 싶은데, 만사가 귀찮았다. 나중에 만나면 얘기해줘야지.


이 도시의 불빛들은 지하철 노인네들 같았다. 너무나 당연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피로하게 만들고, 응당 마주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도대체 몇 시에 타야 1호선에서 앉을 수 있는 거지. 그래도 요 근래에 경험한 지하철 중에 가장 상쾌했다. 기름 냄새와 술냄새, 담배냄새가 나지 않았고, 누군가와 맞닿아있지도 않았다. 가로등이 아닌 주황색 빛이 따스하게 나를 스쳐 지나갔다. 지하철 문 사이로 노을이 보였다. 시린 공기 틈으로 낮게 퍼진 햇빛에 노곤해지며 기운이 차올랐다. 내려다보는 하늘과 도시의 경관이 아름다웠다. 야외활동을 늘리겠다며 야심 차게 구매했던 카메라를 떠올렸다. 제길, 컴팩트 카메라로 살 걸. 큰 맘먹고 할부로 긁고선 들고나갈 일이 없었다. 잠을 자기엔 아까운 하늘이었다. 기운도 있겠다, 사진 찍으며 돌아다닐까. ‘이번 역은 수원역, 수원역입니다.’ 밖을 보니, 승강장에 사람들이 많았다. 내릴까? 집으로 가려면 몇 정거장을 더 가야 하는데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내리고 나니 다시 탈 수도 없게 사람들이 움직였다. 근데, 나 왜 내렸지. 아, 베스킨라빈스!


스무 살의 나에게는 그런 게 있었다. 평탄했다고 생각되는 날, 나에게 주는 보상으로 베라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다는 규칙. 그런 날이 없거나 바빠서 챙기지 못했다면, 월말에 이 달의 맛을 먹는다는 혼자만의 규칙. 집 근처에는 가게가 따로 없었기에, 집에 가는 길목인 수원역사점에서 거사를 치렀다. 이런 월 행사가 언제 끝났더라. 휴학하고였던가, 아니면 고학년이 되고 나서였나. 나는 떠오르는 기억들에 엔도르핀이 활발히 생성됨을 느꼈다. 카드를 찍고 움직이는 내 발걸음도 빨라졌다. 아이스크림은 꼭 더블주니어 사이즈로 먹어야 했다. 이 달의 맛을 포함한 더블 주니어는 할인 프로모션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좋아하는 맛을 함께 고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양도 적당했다. 난 이걸 어떻게 잊고 있었지?


생각해보니, 그 시절의 내가 참 똑똑하다. 그 규칙은 스트레스 관리법이자 나를 대접하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이 달의 맛은 언제고 랜덤이었고 좋아하는 맛이 아닐 때도 많았다. 그래도 좋았다. 이 달의 맛은 다음 달에는 사라질 테니까.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모두 다 그렇게 지나가고 잊혀졌으니까. 스무 살 어른의 세상은 생각처럼 선택지가 많지도 않았고,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생각지도 못해서 화가 나고 슬프기도 했지만, 재밌고 좋았던 것들도 많았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이 내겐 이 달의 맛과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더 많이 먹지 못해 아쉽기도 했고, 한번 맛봤으니 됐다 싶기도 한 것들. 때로는 내가 선택한 아이스크림이 이 달의 맛보다 못한 날도 있었다. 그럴 때는 참 세상사 마음대로 되지 않네-,하며 분홍 수저를 물고 웃었다. 로또를 사는 사람들이 자동으로 사는 건, 자신의 선택보다 나은 선택지가 있음을 알기 때문인 걸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스트레스를 받는 날에 매운 음식을 찾듯, 평온한 날에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건, 평온함이 사건 후에 찾아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과 기운을 소진한 후,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감을 알리는 감정은 대게 평온함이었다. 긴장해있던 몸과 마음이 풀리려는 그 순간이 바로 내 규칙이 발동하는 날이었다. 잔잔한 날의 아이스크림은 맛의 유무를 떠나 달콤했다. 스스로에게 행하는 보상은 하루를 돌이켜보게 만들고, 그 달을 돌이켜보게 만들었다. 잘 버텼구나. 평화라 생각한 날은 투쟁을 통해 얻어졌던 것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좋았다. 참 사치스럽고도 특별했던 규칙을 잊고 살았다니. 그때는 열두 달의 이 달의 맛이 뭐였는 지도 꿰고 있었는데, 이제는 매장에 와서 읽어봐야 아는 사람이 되었다.


북적이는 베스킨라빈스 속, 연말을 혼자 보내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을 혼자 먹는 사람도 나뿐인 것 같고. 나쁜 장난을 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 시간을 그 누구와도 공유해본 적이 없었다. 시간뿐만 아니라, 아이스크림도 자리도 그 무엇과도. 그 누구도 주지 않고 그 누구와도 먹지 않는, 나만을 위한 내가 고른 아이스크림. 순탄했던 하루에도 보상이 필요하다.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무니, 한껏 긴장되었던 어깨가 축 처진다. 아, 이렇게 쉽고 달콤한 삶의 규칙을 잊고 있었다니. 집에 가서는 카메라고 나발이고, 씻고 자야겠다. 새해 첫 이 달의 맛은 뭐려나. 내일도 하나 사 먹어볼까. 나 자신, 올해도 잘 살아남았고 고생했다. 익숙한 캐롤이 매장에서 흘러나왔다. 올해의 마지막 해가 다 저문 시간이었다.




Jang_9_p's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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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도 논픽션도 아닌 이야기를 썼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구직활동과 지속되는 불안감 덕에 아이스크림을 떠오를 일이 드문 요즘입니다. 생산성 없는 삶에서 어떻게든 생산해보려고 노력합니다. 누군가는 내 버릇을 닮았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평탄한 날의 아이스크림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까요.












웹진 <취향껏>에서 선 발행된 원고입니다.

https://chwihyangkkeot.imweb.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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