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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요 May 05. 2020

거실 다이 위 선인장

방만한 밀레니얼 백수의 하루

방만한 삶이다. 거실에 누워 남지 않을 생각을 한다. 생각인지도 알 수 없는 생각들은 알콜처럼 날아간다. 이건 생각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천장을 봤다가 식탁을 봤다가 꺼진 티브이를 봤다. 시험이 두 번이나 취소됐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화하는 게 맞긴 한데, 갑갑하다. 처음부터 코로나 잠식 때까지 시험 안 보겠다고 하던가. 공부한 거 다 까먹겠다. 다시 신청해야 하나. 신청을 해서 필기 시험을 본다한들, 올해 안에 실기 시험을 볼 수 있긴 할까? … 어학으로 갈아타자. 누워있으면서 했던 생각들은 앞서 말했다시피 날아갔기 때문에 당신이 읽는 건 현재 침대에 엎드려있는 나의 생각이다.


거실에 누워있는 나로 돌아가 보자. 거실에서 내 시선을 가장 많이 훔치는 건 TV 밑 선인장이다. 거실 다이 중앙에 놓인 그는 TV의 입장에서도 중앙에 놓여있다. 죽여주는 위치 탓에 누워서도 보이고, 앉아서도 보이고, 서도 보인다. 심지어 부엌 식탁에서도 보인다. 전시 당시 선물로 받게 된 선인장은 단언컨대 가장 마음에 드는 선물이었다. J는 내게 2개의 다육이를 건네줬다. 검정 화분에 든 이름 모를 다육이와, 흰색 화분에 든 선인장. 화분 색상은 복선이었던 걸까? 물론 아니었겠지만, 풀떼기는 죽고 선인장은 살아남았다. 하나만 살아남아서일까, 아니면 백수가 되고 거실에 나오는 시간이 길어져서일까. 지난 2년간 큰 관심 갖지 않던 선인장이 계속 눈에 밟힌다. 물론 백수가 되어서 관심이 가는 거다. 어떻게 살아있지? 쟤가 언제까지 살아남을 것인가. 내가 키우던 로즈마리만큼 살 수 있을까? 나의 무관심과 책임감과 애정을 7:2:1 비율로 잘 섞어서 살게 할 수 있을까? 갑자기 왜 서사를 저 멀리서부터 끌어오냐고 묻는다면, 집에 처박혀서 누워있기만 해서 할 얘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제 본 타란티노의 <펄프픽션> 탓일 수도 있다. 그거, 순서가 뒤죽박죽이니까.


초등학교에 다닐 적이다. 학급에서는 1인 1 식물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우리들은 천 원짜리 식물들로 반을 채워냈다. 학기가 끝날 무렵에 살아남은 식물은 손에 꼽았다. 하도 떨어트려서 식물은커녕 흙도 거의 없는 화분들 사이에서 내 로즈마리는 어째 건강히 살아남아 우리 집 베란다로 거취를 옮겼다. 그때의 나는 식물에게 물을 많아 주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뿌리로 필요한 만큼만 물을 빨아들이고 나머지는 그냥 흘려보낸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비타민을 과하게 섭취하면 나머지는 오줌으로 배출되는 것처럼. 물 부족의 심각함만 알았지 물 과다에 대한 위험성을 몰랐던 거다. 학교에서는 어떻게 물을 줬냐고? 친구가 화분에 물을 주유할 때, 내 것도 부탁하면 된다. 친구가 큰 목소리로 ‘얼마큼 줘!!!’하면, ‘가득!!!’이라고 외치면 됐다. 로즈마리는 어쩌면, 교실이 더 안전했을 거다. 물이 친구의 루틴에 따라, 배급되었으니까. 집으로 온 로즈마리는 물을 줘도 시름시름 앓았고 난 금세 흥미를 잃었다.


내가 로즈마리의 존재를 잊고 밖에서 매미 소리를 들으며 뛰어다닐 무렵, 엄마는 말라죽은 로즈마리를 보고 내게 화분을 치우라고 말했다. 책임감은 없지만, 감수성이 높았던 어린 내가 엄마의 말을 듣고선 무덤에 술 뿌리듯 다 죽은 로즈마리에 물을 주었다. 가서는 목마르지 마라, 하는 노잣돈 개념이었다. 걔가 살아날 거라고는 생각은 안 했다. 물론, 내가 이세계에 갈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치를 가지고 로즈마리의 부활을 꿈꾸긴 했지만. 치우라는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그렇게 물을 몇 번 주며 베란다에 앉아 자주 시간을 보냈다. 살아있을 땐 안 돌보고, 죽으니까 물주는 딸내미를 보던 엄마는 대신 버려주냐고 물어왔다. 당연히 안된다고 했고, 엄마는 지랄 났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로즈마리가 살아났다. 초록빛이 돋아났고, 난 그게 기적인 줄 알았다. 진짜로 신이 나를 여어삐 여겨 행한 기적. 오-하나님, 예수님, 성모 마리아시여. 나의 신앙심은 깊어졌다. 그렇게 살아난 로즈마리는 내가 교복을 입을 때까지 푸르렀다. 물 과다로 다 썩은 적도 많고, 물 부족으로 말라비틀어진 적도 많지만, 걘 자주 죽고 자주 살아났다. 이때 깨달은 게 있다면, 무지함에서 비롯된 애정은 원래 생명을 죽이는 법이라는 것. 식물은 안이 아니라 밖에서 잘 자란다는 것이다.


로즈마리는 강인했으며, 그가 살아난 건 신의 기적 따위가 아니었다. 그냥, 로즈마리가 필수 영양소를 온 힘을 다해 흡수한 탓이었다. 햇빛 난 쪽을 향해 자라나고, 물이 들어오면 흡수하거나 배출하며 말이다. 나의 보호도 관심도 필요 없는 식물에게 물을 줄 수 있는 게 나뿐이라니. 묘한 기분이다. 불도 아닌 물을 허락받지 못하는 지구 생명체들을 생각한다. 비는 평등하댔는데, 어째 그러지도 않은 것 같다. 코로나 사태로 동물원들이 휴업하면서, 그 안의 동물들이 폐사한다는 기사들이 떠올랐다. 누가 그들을 실내로 들어오게 했을까? 나는 선인장을 노려보듯 쳐다봤다. 가자미눈으로 쳐다보니, 어째 선인장의 머리 쪽에 가시가 전보다 덜한 것 같다. 전자파에 의한 탈몬가. 내가 취직을 하고, 독립할 때까지도 선인장이 살아있으려나. 일단 내가 언제 취직하냐가 관건이겠지. 왜 나 판타지 세계로 빙의 안 됐냐. 쟤 물 줬나? 세 달에 한 번 주랬는데... 또 많이 줬다가 죽으면 어쩌지. 주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마음먹었지만, 어째 계속 눈에 밟혔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벌써 저녁이었다. 잠자기 전 물을 마시며,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는 엄마한테 넌지시 물어봤다.


“선인장 말이야... 물 줄까, 말까?”

“내가 물 줬어.”

“나도 챙겨줬어.”

“엥? 엄마 아빠 둘 다 선인장한테 물 줬어?”

“너 물 안 주잖아. 불쌍해서 챙겨줬지.”


난 지금까지 내 선인장이 무관심에서 잘 크는 독립적이고 강인한 생명력의 소유자인 줄 알았다. 우리 집 가장 둘이서 나를 먹여 살리듯, 선인장도 먹여 살리고 있었을 줄이야. 그래, 아사보단 비만이 낫지. 어쩔 수 없다. 운명이다. 선물 받고서 내 방에 두지 않고, 거실 다이 위에 올려둔 건 신의 한 수였던 셈이다. 쟤도, 나도 독립적인 개체가 되긴 글렀다. 아, 내일부터 취준 해야지. 진짜.







Jang_9_p's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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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들도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다는 걸 늦게 깨달았습니다. 같이 치열하자... 너만 치열하지 말고. 저는 또 누워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선인장이 대머리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무섭습니다. 영화 <랍스터>에도 나오듯, 미래 시대에도 대머리는 열성 유전자라고 인기가 없단 말이죠. 대머리는 안된다.









웹진 <취향껏>에서 선 발행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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