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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요 Jun 01. 2020

그 고량주는 50도지만 30도입니다.

그 고량주는 50도지만 30도입니다.






이건 내가 유팔팔씨의 환갑기념 진안여행을 갔을 때의 이야기다. 유팔팔씨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그는 지적이다. 오, 시작이 좋다.




유팔팔씨는 지적이다. 어떤 것을 설명하든 어렵게 설명하는 법이 없다. 세상의 모든 것에 관해 얘기할 수 있다. LP판과 커피, 전자 기기와 인테리어, 동시대의 혁명과 그의 할머니의 삶, 그가 모르는 자의 삶까지도. 과거의 지식과 과거의 경험이 오답이 된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도서관 역할을 뺏기지 않은, 그야말로 현명한 어른이다. 어떤 주제를 주더라도 하루는 훌쩍 얘기할 수 있는 재담꾼인지라, 때로는 말을 흘려 반응하는데, 그럴 때마다 유팔팔씨는 어떻게 알아차리고 ‘너 내 말에 집중 안 했지?’와 ‘너 지금 이해 못 했지?’라고 말한다. 나는 문맥에 맞는 말 돌리기 기술과 100% 통하는 어르신 공략법을 가지고 있는데, 유팔팔씨는 허투루 당해주는 법이 없다. 통하지 않는다고 '면목 없습니다. 선생님.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십쇼.' 하기엔, 유팔팔 말마따나 집중력도 이해력도 떨어진 상태라 입을 꾹 다물거나, ‘아닙니다. 아버님.’하고 단호히 말하는데, 그는 그럴 때마다 ‘뻥치고 있네.’라고 말한다. 요즘에는 ‘입만 열면 거짓말이야.’래파토리까지 생겼다.




그런 그가 환갑을 맞이한 올 5월. 우리는 유팔팔씨의 환갑을 기념하기 위해 놀러갔다. 황금 연휴에 여행을 가기 위한 수작이었지만, 이게 바로 겹경사 아니겠는가. 물론, 환갑 여행의 주인공이 운전을 비롯한 일들을 담당했다. 나와 그의 딸, 유다가 운전하기엔 우리의 목숨은 하나였고, 도시 촌놈인 우리가 시골 일을 어찌하겠는가-(라고 변명해본다) 딸과 자신의 어머니와 딸의 친구를 태우고 운전을 하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풍경 좀 봐라. 내가 좋아하는 초록색이 다 있다. 색깔 죽이지 않냐?




여행 당일까지도 홈페이지 보수 작업에 여념이 없던 나는 새벽까지 일하다가 눈만 조금 붙이고 여행길에 올라 병든 병아리처럼 굴고 있던 참이었다. 차에서는 잠을 잘 못 자는지라, 눈을 끔뻑끔뻑 거리면서 하품을 하고 핸드폰을 하던 내가 그 말에 창 밖을 봤다. 그리고 놀랐다. 저런 수만 가지의 색을 품은 자연을 보고, ‘내가 좋아하는 초록이 다 있다’라고 간단히 표현할 수 있는 그에게 놀랐다. 4DX처럼 내 시야를 감싼 숲은 그야말로 죽여줬다. 봄인지 여름인지 애매한 날이, 숲의 색을 더욱 다양하게 만들었다. 같은 색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스포이트로 여기를 전부 찍어보면 몇만 개의 정보가 축적될 것 같았다. 팬톤 컬러보다도 많지 않을까. 초록의 스펙트럼은 그만큼 위용이 대단했다. 나는 그의 말을 잊지 않기 위해서, 메모장에 적어놨다. 나라면 이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좋은 문장들을 생각해보려 애썼으나, 이를 한 문장으로 풀어낼 수 없었다. 나는 밑에 이렇게 적어놨다.




-채도가 낮은 노랑부터 채도가 높은 초록. 그림자와 햇빛을 굴곡져, 같은 색은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다. 공산품이 아닌 생명임을 밝히듯, 그 무엇 하나 똑같지 않은 자연의 색은 눈을 깜빡일 때마다 달랐다.




둘 중 하나의 카피를 선정해야 한다면, 이건 유팔팔의 승리였다. '내가 좋아하는 초록색이 다 있다'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의 취향과 그가 바라보는 것, 그리고 내가 바라본 것. 순간을 담아낸 살아있는 문장이었다. 애플 마케팅 담당자가 그를 탐내야 한다고 여길 만큼 내게는 충격적인 표현이었다. 나는 그 문장과 그 풍경을 담아내기 위해 감기는 눈을 부여잡고 밖을 내다봤다. 8시에 출발한 우리는 1시가 넘어서야 일목사님의 집에 도착했다. 그 다음으로는 업무를 끝내고 온 유씨 집안의 가장인 어머니, 꼬미씨와 그의 아들, 그리고 우리의 친구 이슬이가 도착했다. 그리고 <20대는 아무것도 안 하는 축제>가 시작되었다. 오로지 먹고, 자고, 마시며 우리는 엉덩이 살을 불려갔다. 4일 내내, 틈만 나면 술을 따서 마셔대는 우리를 보며, 꼬미씨-우리의 엉덩이살을 체크해주셨다-는 ‘할머님도 계시는데, 그렇게 술을 마시면 어떡하니. 자제 좀 해.’라고 했으나, 그녀도 환갑 당일에 등장한 공격성 벌레에게서 와인을 최우선으로 지켜냈다. 그렇게 우리는 진안에서의 마지막 밤에 맥주와 와인, 백화수복을 마시며 흥이 잔뜩 올라 노는데 다시금 큰 문제가 생겼다. 술이 부족했다. 자급자족해야하는 이 깡촌에서, 하나로마트에서 사 온 술이 다 떨어진 것이다. 남은 소주 없냐? 봤는데. 없어. 그거 어제 깠어. 진짜? 진짜 없냐? 우리는 술렁였다. 그 와중에 잠시 바람을 쐬고 들어온 유팔팔씨가 그걸 보더니, 술을 찾아오겠다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금방 돌아온 그는 집주인도 못 찾는 술을 찾아내서 올 것이라는 나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끽해야, 빨간 뚜껑의 그것일 줄 알았는데, 어째 그의 손에는 먼지 쌓인, 그리고 아주 오래돼보이는 고량주가 들려있었다. 환호와 경악이 뒤섞인 비명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그는 태연히 이사할 때 주고 간 술이 분명히 남아있던 걸 기억하고 찾아왔다고 했다. 일목사님이 이사를 언제 하셨지? 2007년 08월 08일. 제조일자가 선명했다. 환갑 잔치를 벌이는 지금은 2020년 05월 03일이었다. 마셔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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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미가 죽여줬다. 다들 알겠지만, 증류주는 오래 보관해도 상관없다. 막걸리는 며칠만 지나도 폭발물로 변형되지만, 고량주는 증류주다. 맛있게 마시면 된다. 그와 나는 냄새도 한 번씩 맡아보고, 한 잔씩 마시면서-나는 불안해서, 유팔팔씨부터 마시라고 했다.- ‘50도는 아닌 것 같다.’, ‘보관이 썩 잘되진 않았다.’는 평을 내리며, 술을 비워내기 시작했다. 그는 고량주를 마시면서, ‘한 30도쯤 되겠네.’라고 했고, 타지 않는 목구멍과 식도에 '진짜 50도는 아니네요. 근데 딱 좋다.’ 하며, 술을 비워댔다. 그렇게 말하고선 나는 크게 웃었는데, 그의 자신만만한 예측이 참 그다웠기 때문이다. 어떻게 30도라고 측정을 할 수 있는건지. 저게 바로 연륜이고 술꾼인 건가? 일목사네 집은 완전 깡촌이어서, 스테레오 스피커로 집이 떠나갈 듯이 노래를 틀 수 있었다. 우리는 돌아가면서 노래를 틀었고, 나는 새로운 노래들을 많이 알아갔다. 특히, 유팔팔씨가 튼 컨트리공방의 노래는 나와 유다의 취향을 저격하면서 서로의 플레이리스트에 저장됐다. 흥이 난 나는, 씽씽밴드 노래를 틀었다. 유팔팔씨는 모르는 걸 모르는지, '저거 그거 아니야' 하면서 이희문과 경기민요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주었다. 아니, 이희문을 아신다고요? 내 친구들도 모르는 이희문을 아신다니! 아, 심지어 저보다 많이 아시고요. 대박대박. 우리 이것도 들어요. 우리는 컴퓨터 앞에 나란히 앉아서 ‘찬실이는 복도 많지’ 뮤비를 보면서 낄낄 거렸다. 내가 60대랑 최신 노래를 듣고,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할 줄이야. 정말, 이상하고 벅찬 기분이었다.


나의 육십을 생각했다. 이럴 수 있을까? 세대의 주역들과 함께, 최신 기기나 음악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술을 마시며 웃는 게 가능한 일일까? 우리는 둘이서 남은 술을 비워냈다. 2007년의 고량주는 2020년에 그 몫을 다했다. 직선적이고 고집쟁이 할망구도 아니고, 이지를 잃은 할망구도 아닌 자가 될 수 있나?  너무 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흐리멍덩하지도 않은-. 잔치의 피날레를 장식한 그 고량주는 50도지만 30도여서 좋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독해지기 보다는, 유해지고 더 풍미가 사는 고량주. 오늘 이렇게 섞어 마셔서 해장아메리카노 쎄게 때려야겠는데… 내일 아침엔 아버님이 내려주시는 커피 한 잔을 마셔야겠다. 나는 풀린 눈을 다잡고, 눈동자를 빛내며 구구절절 불쌍한 척을 하며 그에게 애원했다.




-아버님, 저 내일 아침에 커피 한 잔만 내려주시면 안돼요? 아버님이 타주시는 커피가 제 낙인데, 나흘동안 2번밖에 못 마셔서 너무 슬퍼요. 마지막 날인데 한 잔만…


-허, 누가 못 마시게 한 줄 알겠어. 난 정확히 6시 50분에 모닝 커피를 내리니까, 그때 일어나서 오시든가.




아, 쓰다. 몸과 마음이 쓰다. 도수가 아무리 낮아져도, 고량주는 고량주구나.


-내일 아침에...! 깨워주세요...!

-알아서 일어나.








웹진 <취향껏>에서 선 발행된 원고입니다.

https://www.chwihyangkke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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