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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요 Sep 11. 2020

북한에서 온 터프쿠키

스페인, 순례자의 길에서 맞이한 어느 생일.

- Where are you from?



여행이 언제나 새로움만을 주지 않는다는 걸 이 문장을 통해 알게 됐다. 이 질문은 과연 언제까지 유효할 것인가. 국적이 중요해지지 않는 시기는 언제 올 것인가. 콜라도 김치도 없이 입에 라쟈나를 넣는 것처럼 물렸다. 어서 빨리 국경 없는 사회가 되어라. WE ARE THE ONE. WE ARE THE CHAMPION. 차라리 나한테 코카소이드인지 몽골로이드인지를 물어라. 근데, 그러면 또 고뇌하겠지. 미친놈이 딱 봐도 아시안한테 코카소이드? 이 사람은 무슨 종류의 차별주의자인가, 아님 뿌리 근원 주의자인가. 어디 국제 인류 연합회같은 곳에 건의하고 싶다. 우리, 국적 묻지 맙시다.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이 질문... 그냥 나한테 좋아하는 음식을 물어라.



마빡에 'I'M FROM SOUTH KOREA'를 새겨서라도 이 질문의 늪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까지 왜 안 새겼냐고 묻는다면… 해도 들을 질문임을 알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뱃지를 달고 다녀도, 한국말을 아는 사람도 아묻따 초면 인사로 국적을 묻는 걸 경험한 나는 국적 세탁을 하기로 했다. 


나는 꽤 많은 국적을 가지고 있는데, 자주 이용하는 나라는 일본과 중국, 그리고 북한이다. 중·일의 경우는 고객 맞춤형이다. 내게 중국어나 일본어로 말을 걸면 거기에 맞춰 인사해준다. '곤니찌와'나 '니하오'하고 인사를 거는 사람들에게 단호하게 검지 손가락을 세우고, 'NO'라고 말해준다. 당황한 그들의 모습이 포착된다면, 씩- 웃으며 '곤, 늬, 취와!'라고 답한다. 그러면, 외국인들의 표정도 쓱- 풀리면서 '곤, 니취와?'하고 따라 한다. 그럼 나는 '굿굿' 엄지를 세우며 만족스럽다는 온갖 제스쳐를 취해준다. 물론, 맨날 해주는 서비스는 아니다. 귀찮으면 그냥 지나치고, 때로는 '안녕~!', '응~아니야~' 내지는, 나영석 PD처럼 '땡!'을 외치며 지나간다. 놀라운 사실은 '땡!'하면 틀린 줄 안다. 비언어적 표현의 위대함이란. 여행을 다닐수록 언어가 느는 게 아니라 바디랭귀지만 느는 게 이 탓인가 싶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써먹길 바라면서 중·일 국적 세탁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해보겠다. 시간대별 인사가 있는 일본어의 경우, 곤방와라고 인사가 거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열심히 공부한 그에게는 '곤방와? No, no. That’s not true. 오하요 is formal evening greeting. Okay?'하고 곤방와는 일본에서 사용하지 않는데, 외국에 잘못 알려졌다며 가짜 뉴스를 퍼트린다. 그러면, 아주 좋은 정보를 얻었다며 나에게 '곤니치와' 하고 인사하는 그들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면, 다시 발음을 교정시켜주자. 중국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성조를 죄다 바꿔서 알려 준다. 그리고, 더욱 꿀팁은 아시아인들끼리 모여있는데 말을 거는 외국 무리가 있다면 적당히 속여버린다. 난 말레이 사람이고, 쟨 중국인임. 얜 반일본, 반싱가포르인이다. 사실 거짓말이다. 나는 몽골 사람이다. 그러면, 맞추고 싶어서 혈안이 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다음 국적인 북한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이건 불가항력이랄까. 속이고 싶지 않았으나, 'NORTH OR SOUTH'를 말하면 NORTH라 말하는 게 인지상정인지라 국적 세탁이 이뤄진다. 물론, 노쓰라고 하면 믿지 않는다. 이미 묻는 자들도 북한 사람들이 여행 다닐 팔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니들이 믿든 안 믿든 나는 시리어슬리 노쓰코리아 휴먼이다’ 하며 그들과 투닥거린다. 압록강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 이곳에 왔는데 왜 믿지 않니? 왜 믿질 않니! 하면, '북한 애들은 여행 못 다니잖아.'라고 당연한 말을 한다. 아하. 너희도 아는 상식이었구나.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진 나는 '알면서 왜 물어? 알면서 왜 묻냐고?!' 소리치는데, 이 짓을 몇 번 해보니 다들 하는 말이 '그냥'이었다. '그냥 묻는 거지. how are you? 랑 똑같은 거야.’ 지구촌 휴먼들, 코리아 로직으로 위 아더 월드를 이뤄냅니까?



아무리 대충해도 속아 넘어가는 중국과 일본 국적과 다르게, 속여본 적이 딱 한 번뿐인 북한 국적은 내 열의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첫 여행부터 장장 6년간 동안 북한 사람이라고 열심히 설명해왔지만, 속아 넘어간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으니. 바로 16년도 9월. 내 생일 주에 만났던 노인이다.



그때의 나는 스페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걷고 있었다. 그날의 묵었던 숙소는 넓고, 멋진 공간이었다. 주변에 따로 식당이 없어, 숙소 내에서 식사를 함께해야만 했다. 기다란 식탁에 모여 앉은 순례자들은 스몰 토킹을 하기 시작했고, 지금 회상해봐도 너무나도 미국적 식사 자리였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본 적 있는 평범하고 조촐한 듯 풍성한 땡스기빙데이 디너 파티에서 나는 내가 생일임을 밝혔고, 모두들 'WHAT?' 하면서 내 생일 챙기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뭐라도 맛있는 걸 먹어야 하지 않겠냐며 숙소 주인이 ‘유통기한이 지나긴 했지만, 파운드 케이크가 있어. 초도 있고. 축하 노래도 불러줄게. 괜찮지?’라며 후식으로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날짜가 지났다고 말할 때, 나는 영어는 잘 못 알아듣겠고 심각한 뉘앙스인데 뭐라는겨-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음?' 했더니, 테이블 모든 사람이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케이크를 가져오라고 했다. 심지어 내 옆에 앉아있던 사람은 두 손으로 내 어깨를 잡으며 날짜 지난 케이크도 정말 괜찮다며 설득했다. 그렇게 심각하게 얘기할 필요는 없는데, 세상 어딜가나 날짜 조금 지난 음식이 괜찮다는 어른들이 넘치는군. 생각하면서 말했다. '나도 좋아. 영어를 잘 못 알아들어서 나온 반응이었어. 난 완전 땡큐지.' 나는 날짜가 많이 지나도 괜찮았다.



예정에 없던 후식이 나오면서, 다시 시작된 스몰 소셜 살롱은 내 위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영어를 잘하진 않지만, 유려한 말솜씨로 사람들을 홀릴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마침 처음 보는 노인이 내게 국적을 물어왔고, 나는 그것을 물었다. ‘나는 코리아에서 왔어. 노쓰 코리아. 다들 알지? 너희 압록리버라고 아니?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잇는 강이야. 응. 나는 그 강을 나흘 동안 건넜어. 무려, 4일 동안 말이야. 수영, 또 수영. 군인을 피하고, 배고픔을 참으며 건너왔어. 그렇게 중국에 도착해서 남한에서 살게 되었어.’ 매번 똑같은 래파토리를 사용하다 보니, 희극인으로 빙의해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고, 다들 '이 친구, 재롱을 잘 부리네.'하며 들어주었다. 내 상황극을 받아주는 사람들 사이에 정말 심각하게 듣는 어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내 인생 최초로 북한 국적으로 속아준 사람이다. ‘WOW. YOU ARE A TOUCH COOKIE.’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서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 북한 사람 처음 만나봐. 네가 내 인생의 첫 번째 북한 사람이야. 아주, 용감하고 멋있구나.’ 하면서 그는 나를 아주 대견하게 쳐다봤다. 내 손도 토닥여줬다. 그리고 나는 당황했다. 속이는 자만 있고 속는 자는 없는 이야기 아니었나요? 이거? 이걸 믿는다고?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 오해를 풀려고 하니, 옆에 남자가 재밌으니까 가만히 있으라며 말 못 하게 했다. 내 모든 시도를 막았는데, 심지어 후반부에는 진지하게 막아서 '??? 뭐지. 왜지. 네가 좀 이따 설명할 거냐? 무슨 사연 있냐?'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결국 오해는 풀지 못했고, 나는 그에게 아주 오래도록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순례길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다음 생일을 맞이할 때도 그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남한 사람인 걸 밝히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다. 그의 인생의 도전이었던 순례자의 길에서 만난 터프 쿠키 노쓰코리안 걸은 그의 모험담을 더욱 풍성하게 극적으로 만들어 줬을 것이다. 여전히 그에게 있어서 나는 최초의 북한 사람일까? 북한에서 온 터프 쿠키로 소개되고 있을 나는 세상에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누군가는 나를 중국인으로, 또 일본인으로 그리고, 한국인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국적보다도 진실에 가까운 건, 내가 터프 쿠키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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