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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요 Apr 15. 2021

피스풀 진저, 노라이선스 드라이버

4월의 제주, 경계하는 할머니와 호기심 많은 캣초딩.


비바람이 불어닥쳤다. 어제의 따사로움은 이미 바다를 건너갔는지, 사선으로 내려치는 비는 우산도 옷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제주에는 앞뒤로 여는 문이 드물다더니, 부서지라고 만든 게 아니고서야 미닫이인 거다. 이렇게 바닷가와 인접해있는 곳은 미닫이가 아니면 문짝이 날아가서 큰 사달이 날 것만 같았다. '경험으로 배우는 도시 건축_제주도 편'을 직관하는 건 나뿐만은 아니었다. 방콕으로 떠난 호스트를 대신해 나를 반겨준 고양이 진저도 이런 날씨는 처음인지 커튼 사이로 빼꼼히 밖을 엿보고 있었다. 그래, 쟤가 한 살이랬던가. 날씨는 물론, 이 계절 자체가 처음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국은 이렇게 고약한 날씨를 가지고 있단다. 오늘은 뒷마당이나 옥상은 금지야. 진저와 함께 커튼 사이로 바깥을 바라보는데, 할머니가 비닐 우비를 쓴 채로 스쿠터를 몰며 지나갔다.


검정 선글라스를 쓴 칸예 웨스트가 달구지 달린 스쿠터를 탄 할머니에게 치이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국힙 원탑이 바로 이곳, 제주 한경면에 있었다. 어딜 봐도 과적 그 자체의 스쿠터 뒤에는 스쿠터보다도 큰, 그러니까 사람이 탄 스쿠터보다도 더 큰 달구지가 달려있었다. 이 마을 할머니들은 죄다 저런 스쿠터를 한 대씩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저 과적물이 있어서 날아가지 않고 스쿠터가 나아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나 스쿠터 혼자서는 견디지 못할 비바람이었다. 그런데, 저 할머니. 면허는 있는 걸까?



"없죠. 그런데, 스쿠터가 생계수단이니까 눈감아주죠. 그리고 다들 엄청난 드라이버예요."

"그니까요. 비 오는 날 그 실력이 어마어마하더라고요. 할머니 스쿠터 경력보다 한국의 면허역사가 더 짧을 수도 있겠네요."


나보다 하루 늦게 제주에 입국한 호스트는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데, 정말 삼다도가 맞나봐요. 여기서 할아버지는 거의 못 보고 할머니밖에 못 봤어요."

"이 지역이 지금은 이렇게 평화롭지만, 4·3사건의 커다란 피해지역이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남자들이 거의 없죠. 혼자 사는 할머니들이 많아요."


삼다도, 남자들이 돈을 벌러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아 여자들이 많았다는 제주에는 학살의 피해가 얹어져 삼다도의 명칭을 더욱 굳혀진 셈이었다.


"다들 무뚝뚝해 보이고 외지인을 경계하시는 게 심하시지만, 다들 좋으신 분이에요. 요즘에는 문 앞에 매번 먹을 걸 툭툭 두고 가신다니까요. 뭐든 나눠주세요."



그리고 경계가 무엇인지 모르는 고양이 진저는 내 위에서 골골거리고 있었다. 엉덩이를 팡팡 쳐주다 보니, 어느새 내게서 관심을 잃고 떠나갔다. 지금이다. 나갈 준비를 했다. 방구석 여행객이라지만, 밥도 먹고 커피도 마셔야 하기 때문이었다. 제주도는 학교를 근처로 상권이 형성되어있는데, 나는 바로 학교 앞에 숙소를 잡았다. 중국집과 치킨집이 있고, 또 자그만 카페도 있었다. 거기서는 진저라떼를 삼천 원에 팔고 있었다. 아메리카노 사천 삼백 원 시대에 혜자 라떼를 지나칠 수 없었다. 그리고 일기장에 안정적인 라임으로 '머무는 숙소의 고양이 이름은 진저, 그리고 오늘 먹는 진저라떼.'라는 문구도 쓸 수 있다. 카페 내 비치된 독립시집을 보며 필사한 뒤에 돌아온 숙소에는 진저가 보이지 않았다. 할 일이라곤 없는 내게 고양이 찾기란 재밌는 놀이를 스킵할 순 없었다. 옥상에 올라가 밑을 찬찬히 내려다보니, 마당 풀숲 사이에 있는 작은 노랑색 고양이가 보였다. 정말, 경계라고는 없는 모습이구나. 반대편에서는 할머니들이 달구지를 달고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저 할머니일까, 문 앞에 해산물을 두고선 툴툴거리는 사람이. 아직 비 기운이 다 가시지 않아 쌀쌀하고도 어둑하지만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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