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사는 거 개처럼 열렬한 매일을 살고 싶다
군가를 반드시 미워해야 마땅한 상황을 마주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천생 바보가 되어버리니. 이제 몇 스쿱 남지도 않은 달달한 진심은 맥없이 볼모로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버둥을 치다, 제풀에 지쳐 스스로 온몸을 와그작 구겨서는 기어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납작해져 볼품도 쓸모도 자격도 없어 보였다.
그때, 쿱쿱한 바다 미역 냄새가 나는 두리뭉실한 누런 개가 내 무릎을 파고들었다. 뒤이어 남 잘되는 꼴 못 보는 탄력 없는 거죽의 구수한 늙은 개가 어김없이 그 틈을 비집고 올라타 고약한 입 냄새를 풍기며 미지근한 혀로 내 입을 구석구석 핥았다. 내 체온을 조금 웃도는 이 작고 북실한 덩어리들은, 생각해보니 한 시도 빠지지 않고 내 주변을 어슬렁댔다. 어제도, 오늘도, 그제도, 10분 전에도, 10초 후에도 언제나 나만 바라보고, 나만 기다렸다. ‘순수’ 라던지 ‘한결같은’과 같은 식상한 단어로는 충분히 설명하기 힘든 이 놀랍도록 일관된 애착의 시선들.
어른이 되기로 하면서 우리는 ‘적당히’를 배우고 연습한다. 활활 태우기보다 휘휘 식히는 방법을 배운다. 마음을 쓰기보다 쓰지 않는 길이 현명하고 쿨하다 배운다. 아낌없이 주기보다 적절한 씀씀이를 권장한다. 반면 개들의 하루는 꾸준히 열렬하다. 후회 없이 자고, 후회 없이 달려들며, 후회 없이 맛있게 먹고, 또 달려들고, 하루 종일 좋아하고, 다시 열렬히 잠을 잔다. 그렇게 항상 심장이 열렬히 뛰기에 수명이 그토록 짧은 것일까?
누구도 내 수명을 점칠 수 없다면, 이왕 사는 거 앞으로는 개처럼 열렬한 매일을 살고 싶다. 더 멋지고 속이 시원해 보인다. 미움과 분노와 슬픔에 짓눌려 구겨져만 있기에 우리의 삶은 참 짧고 아까운 시간이다. 미움도 분노도 슬픔도 다 내가 과장하여 주조해낸 허상은 아닐까. 하지만 그 과장된 허상 또한 열렬한 마음의 결과물이라면, 후회 없이 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