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벽난로란
2021년 지평에서의 겨울, 영하 17도의 기온에 보일러가 얼었던 경험이 있다. 눈도 발목까지 쌓여 가파른 오르막길이던 우리 마을 주민 모두 고립되었다.
코가 시린 아침을 맞고, 가만히 있으면 추워서 눈 청소로 땀을 내며 몸을 녹였고, 인생 처음으로 얼어있던 분배기를 건드려봤고,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언 배관을 녹여보았다. 살면서 한번쯤은 마주해야 할 위기를 해결하며 나는 인간으로서의 쓸모를 느꼈다. 또 더 강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 그날을 계기로 ‘보일러 고장’은 살면서 고려해야 할 최악의 상황 리스트에 등재되었다.
영화 <투모로우>는 내가 영화관에서 본 두 번째 영화 정도로 기억한다. 영화가 세상에 충격을 전한지 벌써 20년이 됐다. 순식간에 지구에 찾아온 빙하기에 New York Public Library로 피신했던 사람들이 인류 역사의 보고인 장서를 태우냐 마냐 논쟁하다 결국 벽난로에 책을 던지던 장면은 20년 동안 떠오른다.
보일러가 고장났던 그 날도 <투모로우>의 그 장면을 떠올렸다. 난 추워도 되지만, 사시나무처럼 떨던 개들에게 미안해서. 빙하기도 견디게 한 <투모로우> 속 벽난로가 있었으면 우리 개들 안 추웠을텐데. 우리 개들 뜨끈뜨끈 아랫목 좋아하는데. 내가 벽난로를 놓기로 결심한 건 정말로, 순전히, <투모로우> 때문이다.
오늘, 골라 놓은 벽난로 실물을 확인하러 갔다. 멀찍이 앉았는데도 온몸을 감싸는 훈훈한 온기에 겨울철 보일러 고장이 두렵지 않았다. 혹시 모를 재난 상황을 대비하는 용도라고 하기에는 가격이 다소 사악했지만.
벽난로를 구경했다는 얘기에 준오가 대뜸 “그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처럼 할 수 있는 거야?“ 물었다. 콜바넴이 여기서 왜 나와? 했는데 1초 뒤 뇌리를 스치는 티모시의 그렁그렁 눈망울.
나는 지구가 멸망하는 재난 영화를 상상했는데. 언제나 최악을 먼저 상상하는데. 맞다. 사실 벽난로란 그렇게 낭만적인 물건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