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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영 Mar 16. 2024

사치스런 부자유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미팅이 오전 종로라 출근길 정체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수년만에 느끼는 출근길 분위기. 사람들의 표정은 살벌하고, 말 한마디 나누지 않지만, 공기만큼은 바쁘고 치열하다. 긴박한 출근길 레이스에 합류하자 어깨에 긴장이 잔뜩 어렸다.


한참을 서서 가는데 문제가 생겼다. 긴장한 탓인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 시계를 보니 오전 아홉시 반쯤이다. 매일 모닝 커피 마시고 화장실로 달려가 전날의 식사를 배출하던 시간이다. 바삐 나오느라 커피 한 모금 못 마셨는데 내 위장 시계는 루틴을 기억한다. 하지만 아직 내리려면 30분이나 남았다. 괄약근에 힘을 주면서도 열차의 흔들림에 고꾸라지지 않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 자꾸만 사람들이 밀려온다. 발 간격이 좁아지며 균형을 잡기가 어려워지고, 예상치 못한 이 신체 부자유에 바디 컨트롤은 난항을 겪는다.


옴짝달싹 못하고 숨죽이는 처지를 생각하니, 어제 마저 본 다큐멘터리 속 양계장이 떠오른다. 그곳의 닭들은 좁은 케이지 안에 갇혀 있지는 않으나 비좁은 공간에 수만 마리가 발 디딜 틈 없이 전쟁같은 삶을 산다. 스트레스 받은 닭들은 서로를 쪼아댄다. 털이 빠지고 상처가 나지만 치료 시기를 놓치니 몸은 염증과 고름으로 가득하다. 양계장 주인은 항생제를 계속 맞춘다고 했다. (그래서 본인은 자기가 키운 닭을 절대 먹지 않는다고.) 이런 일을 줄이기 위해, 그러니까 닭의 ‘상품성’ 유지를 위해 양계장에서는 태어난 병아리의 부리를 뜨거운 인두로 지져 뭉툭하게 만든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오늘 하루 몇십분 잠깐, 화장실못 가고 옴짝달싹 못 하는 것으로 부자유를 논하는 것은 사치다. 공장식 축산에 묶인 동물의 부자유는 우리 인간이 감히 가늠할 수 없다. 날 때부터 고통이었으니 그들에게는 익숙한 것이라고 우리 스스로를 안심시켜야 할까? 그러나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고통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다.



병아리 부리 자르기(debeaking) / 출처: PETA India 웹사이트


인간의 탄생은 축복받는다. 한편 그들에게 탄생이란, 삶이란, 시작되기 전이 오히려 축복인지도 모른다. 그 가여운 삶에 허락된 자유는 오직 어미의 뱃속에서가 전부인지도 모른다.


역에서 나오니 고소하고 달콤한 버터 빵 냄새가 난다. 길가의 카페에서는 우유 스팀기계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달콤한 와플, 부드러운 라떼, 풍미 가득한 크루아상, 새콤한 요거트 스무디를 지나친다. 우리가 ‘먹는 자유’를 얻고자 취하는 그 하얗고 노란 음식 속에서 수억마리 닭과 소들의 부자유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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