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태의 의미를 바꿔야겠다
“도태되는 기분 들지 않아요?”
서울을 떠나 시골에 살고 있다고 하면 종종 듣던 말이다. 재작년인가,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어느 젊은이에게 들었던 게 마지막이다.
도태 淘汰
1. 물건을 물에 넣고 일어서 좋은 것만 골라내고 불필요한 것을 가려서 버림.
2. 여럿 중에서 불필요하거나 부적당한 것을 줄여 없앰.
그 나이, 그 친구의 눈에는 내가 도태된 존재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이토록 빼곡한 사회에선 누구나 불안하고 자기중심 없는 이십 대의 시간을 겪기 마련이니. 도시의 스피드에 맞춘 치열한 업데이트를 하지 않는 내가 부적당해 보였을 수도 있다.
나다운 삶에 안착한 지 오래라 그런가. ‘도태’라는 단어 자체가 생경하다. 생물학적으로든 사회적 의미로든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어떤 기준을 두고,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불필요하고 부적당한 것으로 구분하는 차별적인 단어로 느껴진다.
어떤 경험이 비로소 나를 나답게 만들었을까. 언젠가 그 도화선의 여러 갈래를 낱낱이 뒷조사해 봐야겠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도시의 속도로부터 멀어지면서 나만의 페이스를 찾기 시작했다는 것을. 나무, 숲, 바람, 태양, 폭설, 폭우, 벌레, 잡초, 야생동물. 세상이 내 중심,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피부로 직감하게 하는 대자연을 곁에 두면 그렇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으로 회귀한다’는 표현을 쓰는 걸까.
오늘도 느린 속도와 비효율적 동선으로 현장의 쓰레기를 주웠다. 이모저모 구경도 하고, 사진 기록도 남기고, 쭈그려 앉아 일 전화도 몇 통 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두 시간 반이 지났다. 며칠 동안 꾹꾹 눌러 담아 채운 쓰레기 봉투를 카트에 싣고, 서쪽 노을을 보며 마을 입구로 뚤레뚤레 걸어 나간다.
나무 그 옆에 나무. 그 옆에 더 큰 나무. 움직이는 것은 나뭇잎과 벌레와 새들 뿐. 비온 뒤 선명해진 풀내음. 대번에 알 수 있다. 이 여백과 자유가 내 삶을 무궁구진하게 한다는 것을. 여기 이곳의 어느 부분도 도태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았다.
도태의 의미를 바꿔야겠어.
자연으로 (도)로 되돌아가, 다시 (태)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