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향땅, 북향집, 국유림, 그리고 재선충
우리 집은 정남향의 긴 땅에 북향으로 지은, 제법 용감한 집이다. 그렇다고 남향빛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기에 ‘향’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마당도 현관문도 주로 내다보는 창문도 대부분 북쪽에 있다.
이웃집 정 선생님은 집의 골조가 올라가자 마당 방향을 눈치채고 내 성향을 추측했다고 한다. 어쩐지 그다음부터 연락이 확실히 뜸해졌다. 정남향이라는 이점을 포기할 만큼 고독과 고립은 내 삶에 꼭 갖춰져야 하는 기본 세팅값이다. 인간 세계의 갈등에 질려 여기까지 왔는데, 시야에서도 좀 치우고 싶은 마음.
마당은 북쪽의 숲과 연결되어 있다. 키 큰 잣나무, 참나무, 이름 모를 각종 나무가 있는 국유림이다. 부동산에 땅을 문의할 때 다른 건 몰라도 무조건 “한쪽이라도 국유림을 접한” 땅만 보여달라 했다. 가끔 부동산에서 종중 임야를 국유림으로 잘못 알고 보여주는 경우가 있었는데, 사유지라 그 산이 미래에 어찌 될지 모르니 토지 정보 사이트에서 사유지 여부를 꼭 찾아보아야 했다.
숲을 볼 때마다 잘했다 생각한다. 국유림을 접한 땅에 집착한 것은 ‘물은 멀리하고 나무를 가까이 하라’는 사주 때문만은 아니다. 지평에서 삼면이 숲으로 둘러싸인 집에 살았던 경험 때문이다. (그 숲은 사실 종중 임야였다. 그래서 군데군데 묘가 많았다.) 나는 강이나 바다를 탐내진 않아도, 나무가 무성한 숲은 가까이 두고 싶다.
숲과 나무는 시간, 날씨에 따른 변화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인간 기준에서 변화지, 사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숲의 일상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내가 우주의 흐름 속에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지금 바라보는 숲에도 고양이, 고라니, 까마귀, 두더지, 청설모, 이름 모를 아름다운 새들이 오간다. 며칠 전에 엄청나게 커다란 새가 한참 앉아있다 떠났는데 ‘매’였던 것 같다.
숲을 보는 삶은 여러모로 이롭다. 눈에 무엇을 담고 사느냐는 삶의 관점마저 바꾼다. 인위 대신 자연스러운 것을 많이 담자 연약해졌던 자정 능력을 회복하는 기분이 들었다. 멋진 나, 강한 나, 잘난 나보다 '자연스러운 나'를 추구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잣나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중에 잎이 갈색인 잣나무가 있다. 녹색의 잣나무와 함께 조화로운 색감을 이루지만, 잎이 갈색으로 변한 소나무나 잣나무는 사실 재선충병에 걸려 죽은 나무다. 허리에 흰 띠로 표식이 되어 있다.
그 갈색잎 잣나무들을 베어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재선충병이 무엇인지 찾아보게 됐다. 재선충병은 하늘소를 통해 나무와 나무 사이에 전염된다. 하늘소를 매개로 한 가는 실 모양의 재선충이 소나무의 수관을 막아서 말라죽게 만든단다. 어떤 전염병도 명함 못 내밀, 치사율 100%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시들음병’이다. 치료하는 방법, 없단다. 예방 외에는.
해마다 재선충병 관리 예산이 정해져 있어 예산을 모두 소진한 작년에는 벌목을 못했다. 그리고 그제 숲에 재선충병 관리인들이 등장했다. 다음 주에 죽은 잣나무 세 그루를 베어갈 것이라고 한다. 지평에 살 때도 비슷한 광경을 자주 보았던 것 같다.
집에 너무 가까이 닿은 나무와 무성했던 칡덩굴은 한차례 제거한 탓에 황량했던 숲은, 죽은 잣나무들이 사라지면 더 황량해질 예정이다. 황량한 숲에 대한 불만은 없다. 숲을 지나다니는 야생동물이 더 잘 염탐할 수 있고, 땅과 나무가 어떻게 제 모습을 되찾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인위(=나)가 자연을 파괴한 결과물을 대놓고 보여주니 경각심도 준다.
숲을 풍성하게 만들자고 나무를 심을 수도 없다. 국유림은 나라 땅이기 때문에 허락 없이 나무나 농작물을 심으면 철컹철컹이다. 마당이 심심하니 뭐라도 심어볼까 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들 때가 있지만, 땅의 회복력을 기대하는 한 해를 보내게 될 것 같다. 자연과의 '자만추'. 모든 땅은 연결되어 있기에 숲 따라 우리 집 마당도, 우리 집 마당 따라 숲도, 그리고 나도, 각자가 추구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회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