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무명의 죽음

by 문영

얼마 전, 동방의 한 음악가의 죽음에 전 세계가 추모의 물결로, 아니 거대한 파도처럼 출렁였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아우라를 풍기던 그의 음악을 더 이상 새로이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비슷한 시기, 서울에서 50분 거리의 경기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에서는 1,500여 마리 개들이 굶어 죽은 뒤 오래 방치된 채 발견되었다. 살과 내장은 숨이 푹 죽어 흔적이 없고, 뼈와 털 뭉텅이만 군데군데 남긴 채였다. 푸들 종의 한 아이는 철창을 이빨로 문 채 고통 속에 죽어갔음을 고스란히 보여주었고, 거대한 고무통 여럿에는 숨 죽은 동물 사체가 겹겹이, 납작하게,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이토록 엽기적인 학대와 살해는 어떤 상상력을 동원해도 생각해내기 힘든 것이었다. 그들이 근처의 번식장에서 ‘쓸모’ 없어져 그 고물상에 마치 고물처럼 단돈 만 원에 팔려왔다는 사실은 더욱 경악스럽다. 그리고 이들이 발견된 고물상에서부터 이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면, 특정 견종을 향한 한국 사람들의 기형적인 욕망이 언제나 숙주처럼 자리하고 있다.


IMG_3214.jpg


두 죽음을 마주하고 얼마 뒤, 양평에서 대량학살 당한 개들을 위한 위령제에 참가했다. 거리로 나가 목소리를 보탠 것은 대학생 때 이후로는 처음이지 싶다. 죽음의 수가 어마어마하기에 종로 대로 한켠을 가득 메우리라 생각해 물건을 분실하지 않도록, 인파에 쓸려 다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 후 외출했지만, 그런 준비는 무색했다. 주말마다 종로 앞을 가득 메우는 정치 이권 시위와 비교하면 보신각 앞에서 열린 위령제의 규모는 참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날씨가 참 좋고 공기도 맑은 날이었다. 그날도 모든 것이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햇살은 적당히 따뜻하고, 바람은 선선했다. 위령제에 모인 사람들의 눈물만이 뜨거웠다.


부은 눈으로 동네에 돌아오니 얼마 전 새로 생긴 펫샵 앞에는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쇼윈도의 새끼 강아지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기분 전환차 영화를 보러 방문한 스타필드의 아쿠아리움 입구에는 작은 유리 수조에 갇힌 생명을 신기한 듯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들만의 오붓하고 신나는 시간을 만끽하는 가족 단위의 구경꾼들이 즐비했다.


김 아무개, 이 아무개, 조 아무개… 그들은 이런 흔한 성씨 하나, 이름 하나 없어서일까? 분노하고 억울해할 유가족이 없어서일까? 비인간 동물의 생과 사가 받아들여지는 방법은 인간 동물의 그것과 늘 다르기만 하다. 하지만 이를 ‘종차별’이라 말할 수 있을까? 차별에는 어느 정도 ‘인지’와 ‘의도’가 담겨있어야 하지만, 이런 종차별은 명확하게 인지하고 의도된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한 사회에 태어나 자라는 과정에서 체화된 집단적 이기주의이자, 사회가 정상화한 비정상이다.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중대한 법 개정을 손꼽아 기다리는 오늘, 몇 년 후라면 이들 죽음의 사회적 무게가 지금보다는 무거웠을까 생각해 본다. 1,500배 무거웠을까? 바로 4월 오늘처럼, 매년 곱씹는 크나큰 다짐을 주는 사건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1,500만 반려 시대지만 이 1,500마리는 여전히 이름도, 가족도 없는 무명의 죽음이라서 변함없이 빠르게 잊혀질까?


목숨 명, 이름 명. 죽음 앞에서 ‘명’이 있고 없음의 차이는 이렇게 크다. 그들은 단지 이름이 없었을 뿐, 이름 불러줄 가족을 가져볼 기회를 박탈당했을 뿐, 그들의 목숨 자체가 덜 중요하고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덜 중요한 것처럼 휘발되기에 더 쓸쓸한 죽음. 정확한 수를 알 수 없어 ‘~여 마리’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것도, 그들의 죽음을 이유로 외양간을 고치는 시도를 하는 것조차 미안해지는 죽음이다.


얼마 전 작고한 그 음악가가 내게 유의미한 인물로 기억된 이유는 그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덕분이다. 선율로만 접했던 그의 음악 세계는 알고 보니 강력한 인류애, 미물이나 물건에까지 지녔던 애착, 타자의 슬픔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능력들이 모두 응축된 것이었다. 무명의 쓸쓸한 죽음을 목격하면서 그의 작고는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이름이 있든 없든, 그 음악가라면 모든 죽음에 똑같이 안타까워하며 위로했을 텐데. 위대한 음악만큼이나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동시대 인물이 우리의 곁을 떠났다는 것은 진정 커다란 상실이다.


오늘 같은 날은, 평소 열중했던 것들을 잠시 내려두고 무관심했던 것들에게 약간의 공간, 잠깐의 시간을 내어주면 어떨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외로움 나이 3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