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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정 Dec 05. 2022

카페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공간의 의도


올해 첫눈은 서울에서 맞았다. 금세 비로 바뀌어버렸지만 서울역 기차선로 위로 흩날리던 하얀 조각은 분명 눈이었다. 아침 일찍 서두른 탓에 약속 시간까지는 한참이 남았고,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익숙하게 서촌으로 향했다.


서촌은 '한때 내가 살던 곳'이라고 말하기에는 지나친 애정을 품고 있는 곳이므로 이 동네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야 할 때는 우선 심호흡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한껏 올라간 어깨로 두 손을 모아 쥐고 '제가 너어어어무 좋아하는 곳'이라고 첫마디를 시작한다. 이전에 썼던 책 문장을 빌려 표현하자면 신이 내가 좋아하는 모든 걸 쏟아부어 만들어 놓은 동네 같은 곳이 바로 서촌이다.


나에게 서촌은 그런 곳이었다. 하늘에 있는 누군가가 내 취향을 정확히 알고 동네 곳곳을 만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에게는 안성맞춤인 곳.
 p.170
 
<낭만서촌>


그곳에 살았던 시간보다 떠나온 지 훨씬 더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경복궁역에 도착해서 익숙한 은행나무와 흰 눈이 쌓인 기와를 보면 울컥한다.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눈물이 와락 나려는 걸 현대인의 지성과 어른의 자존심으로 가까스로 참으려고 노력한다. 서촌이 만약 헤어진 애인이라면 우리가 헤어진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이러냐며 질색했을 것이다.


지하철 역에서 나와 추억이 뚝뚝 묻어있는 적선시장을 지났다. 가장 먼저 토요일에만 문을 여는 작고 따스운 가게 '39도 스콘'으로 가서 친구에게 선물할 스콘을 한 박스를 살 생각이다. 뜻밖의 방문을 반겨주는 사장님과 인사를 하고, 만두나 떡국떡처럼 냉동실에 차곡차곡 저장해 둬야 안심이 되는 내 몫의 스콘도 잔뜩 포장했음은 물론이다. 역으로 가는 길 '한 권의 서점'에 들러 오늘 지하철에서 읽을 책을 구입하고 '갤러리 팩토리'에서 전시를 볼까 하다가 역시나 카페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창이 넓은 카페에 들렀다. 혼자만의 짧은 서울 나들이의 마무리로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스트'는 서촌에서 흔하지 않은 고층의 티 카페로 동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라길래 구글 지도에 깃발을 세워놓았었다. 가장 치열하다는 창가 테이블에 빈 자리가 있었지만, 나는 카페 밖 풍경보다 카페를 바라보는 걸 더 좋아하기 때문에 창가 테이블에 나란히 않은 사람들의 뒷모습과 실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맨 뒷자리에 앉았다. 벽을 등지고 앉으면 카페 안에 가구와, 오가는 사람들, 벽에 붙여놓은 포스터와 분주하게 스텐 카운터를 닦고 있는 직원까지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다른 곳을 쳐다볼 여유 없이 노트북 모니터만 쳐다보며 일할 때나, 아이들과 함께 와서 혹시나 음료수를 쓰러뜨릴까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할 때는 놓쳤던 풍경이었다. 그 익숙한 아름다움과 고요함을 새삼 확인하려고 더 느리게 움직여 본다. 책을 꺼내 읽고 싶다가도 잠시 의식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갖는다. 오늘처럼 일거리 없이 들른 혼자만의 카페 타임에는 그냥 멍하니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관찰한다.

아름답고 간결한 티포트를 본다.

창밖 풍경이 잘 보이도록 조금 높게 만들어진 테이블을 본다.

원목 테이블 위 화병에 담긴 처음 보는 꽃을 본다.

나란히 진열된 인센스와 핸드크림을 본다.

나처럼 혼자 온 사람이 고른 메뉴를 본다.

창밖을 열심히 찍고 있는 행복해 보이는 두 여자를 본다.

소금 알갱이가 씹힐 때마다 맛있어서 깜짝 놀라게 되는 놀라운 맛의 후무스를 빵 사이에 발라 먹으며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눈앞의 풍경을 바라봤다.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 내일이면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평범한 것들까지 모두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처럼.


차 한 잔을 마시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보고, 다시 천천히 빵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제각기 다른 이유로 여기 왔을 사람들을 구경한다. 그러면서 이 카페에는 테이블은 많지만 콘센트는 단 세 개뿐이라는 것도 확인한다. 노트북을 들고 오기보다 홀가분한 몸으로 와주길 바라는 공간의 의도를 파악한다. 카페에 의도대로 나도 더 이상의 글쓰기는 멈춰야겠다. 얇은 수첩을 덮고 다시 차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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