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바인더 다이어리와 36색 크레파스
내 최초의 문구는 바인더 다이어리와 36색 크레파스다.
초등학교 입학 후 아버지와 함께 간 모닝글로리에서 직접 골랐다.
태어나서 가진 것 중 가장 좋아한 물건이다.
다이어리 표지는 에폭시가 있어 푹신했다.
버튼을 ‘똑딱’하고 열면 달력과 스케줄러가 있었다.
무선 노트와 그 사이에는 휘황찬란한 그림의 인덱스 간지가,
끝에는 지퍼형 수납백과 탈부착형 플라스틱자가 있었다.
맨 마지막에는 프로필 페이지가 있었는데, 딱 한 장 밖에 없었기에
이름, 전화번호, 주소를 틀리지 않기 위해 진땀을 뺐다.
그 다이어리를 처음 사용했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크레파스는 은색과 금색이 있었다.
은색은 딱딱하고 거칠었다. 숯을 종이에 긋는 것 같았다.
잘 칠해지지 않았고 종이를 잘 찢었다.
그래서 자주 사용하지 않았다.
반면 금색은 살짝만 그어도 부드럽게 밀렸다.
나는 그것이 몽당이 될 때까지 애용했다.
감싸고 있던 종이가 사라져 금색 반짝이가 묻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진다는 것이 제일 좋았다.
불편해도 좋았다.
(에폭시 쪽 페이지는 글을 쓸 때 종이가 흔들렸고, 스케치북은 금색 크레파스 덕분에 항상 더러웠다.)
크레파스와 다이어리로 시작된 문구 덕후로서 이런 생각을 한다.
“펜을 타고 종이에 닿은 내 생각은 내 기억보다 오래 머문다”
사랑을 표현할 때, 부끄러운 하루를 정리할 때, 누군가를 욕하고 싶을 때, 외로울 때
문구는 항상 나와 함께였다.
짧은 글부터, 알록달록한 그림까지 내 생각과 문구는 하나다.
이러니 문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