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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끔 너는 나를 몽상가라고 불러

by 장민혜

그들의 노래를 접한 건 우연이었다. 2023년 3월 22일 새벽, 불면증에 시달리던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수면제를 먹으며 불면증을 치료 중이었지만,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늦게 잠들고 일찍 일어난 새가 새로운 노래를 발견한다고 하던가. 물론 없는 말이다. 그렇게 나는 깨어났다. 깨어나 플레이리스트를 채울 음악을 찾고 있었다. 그때 ‘우주를 노래하는 밴드’라는 글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어렸을 적의 나는 천체물리학자를 꿈꿨다. 천체물리학은 지금도 내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로, 천체물리학이 주는 아름다움에 깊게 매료된 상태였다. 이들을 소개하는 여러 곡 중에서 ‘궤도’라는 곡이 눈에 들어왔다. 궤도. 발음을 곱씹으면 이보다 더 딱딱하고 이성적일 수 없는 단어였다. ‘궤도’를 배경으로 어떤 노랫말을 써 내려갔을지 궁금했다. 음악을 재생하자 공허한 우주 속에 있는 듯한 고요한 순간이 나를 기다렸고, 처음 등장하는 가사는 ‘가끔 너는 나를 몽상가라고 불러’였다. 이 말은 내 이전 연인에게도 들었던 말이었다. 소설가인 나를 스쳐간 인연들은 “너는 너무 몽상가 같아” 혹은 “너의 몽상가적 기질을 나는 이해할 수 없어” 같은 말을 쉽게 내뱉곤 했다. 무뎌진 상처가 ‘궤도’라는 곡을 들으며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가사는 계속해서 궤도라는 주제와 걸맞게 진행된다. ‘너의 궤도를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진행되는 가사 속에서 나는 지나간 사랑을 떠올렸다. 태양계에서 퇴출된 명왕성을 떠올리기도 했다. 명왕성은 이제는 행성의 이름을 박탈당했지만, 여전히 태양의 주변을 일정한 궤도에 맞게 움직이고 있다. 그와 나의 사랑 역시 그랬다. 이별을 먼저 고한 것은 나였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사랑에는 온도가 있다는 말을 되새길 때마다 나는 그가 마지막으로 지었던 음울했던 표정을 떠올렸다.


그와의 만남은 ‘궤도’의 노랫말처럼 ‘필연적으로 이끌렸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가까운 듯하면서도 먼 사이였고, 시절인연이란 말처럼 한때 가까웠다. 가까웠던 시간은 짧았다. 기다림에 비하면 우리가 함께한 세월은 찰나의 것이었다. 하지 못한 것들이 많다는 것이, 우리가 나눴던 대화가 어느 순간의 기억으로 흩어져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 그를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 “나는 더 이상 네가 보고 싶지 않아”라고 속삭이던 마지막 말까지도. 그는 나의 몽상가 같은 기질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내가 지나친 이상향을 추구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나의 양면성에 대해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을 때, 나는 그의 현실적인 모습에 반했다. 우리는 같은 듯하면서도 결이 달랐다. 다른 결 속에서도 나는 부단히 사랑을 찾아 헤맸다.


짧은 시간이 지나가고, 그와 마지막 통화를 했던 그 날. 그는 이별이 후회가 되고 힘들면 전화를 하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날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을 변하게 한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의 궤도를 떠돌고 있지만, 그는 내가 자신의 주변을 돌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더는 그와 가까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를 떠올리고 그리워하길 반복하고 있다.


이 세상에 단 한 번, 결혼이라는 단어가 내 인생에 성립이 된다면. 그런 전제로 생각을 해 본 적 있다. 그건 아마도 그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별을 준비하며 우리의 사이가 틀렸음을 증명하려고 했고, 그에게서 흠집을 발견하려고 애썼다. 사랑하는 마음은 뒤로한 채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온도가 달랐을 뿐이었다. 내가 빠른 속도로 달아오른다면, 그는 천천히 달궈지는 쇠와 같은 인간이었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 그를 떠나보낸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폐허만이 남았다. 우리가 언제 사랑을 하긴 했던 것일까.


‘그때부터 나의 별은 너였단 걸 너는 내게 다가오며’라고 ‘궤도’의 가사는 끝맺음을 한다. 이를 한 곡 반복해서 들으면 ‘너는 내게 다가오며’ ‘가끔 너는 나를 몽상가라고 불러’라고 연결할 수 있다. 마스0094에서 원위라는 밴드로 재데뷔하고 3년이 지난 뒤 기타리스트 강현이 선보였다던 이 곡은 앞과 뒤가 연결되는 구조로 돼 있다.


이 곡을 들으며 나는 ‘궤도의 밖’과 ‘안’을 떠올리곤 한다. 오늘도 끊임없이 자전을 반복했다. 자전을 하면서도 먼 궤도로 그의 근처를 떠돌고 있다. 그는 내가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그런 궤도로. 퇴출된 명왕성에게 번호가 부여된 것처럼, 나 역시도 그에게는 어느 한순간의 인연이자, 번호가 부여됐겠지,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그게 우리의 궤도라면 말이야. 너는 지금쯤 어디 있는 것일까. 나는 네 주변을 공전하고 있는데, 너는 어떤 이의 곁을 공전하고 있을까. 서로 다른 궤도 속을 헤매다 보면 우리가 언젠가 만날 일이 생길까.


그때가 되면, 너는 내게 다가오며 다시 한번 나를 몽상가라고 부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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