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둘 흔적도 서로 닮은 버릇도 그 긴 시간들이 먼 훗날 단 1초의 주마등으로 수없이 불러본 네 이름도 마지막일 거라서 망설이지 않았더라면 그때 너의 두 손을 잡았다면 눈부시던 너와 당연했던 너를 더는 바라볼 수, 안아줄 수도 없잖아 솔직히 지금도 네가 떠올라 하루도 잊은 적 없었어 다시 그 자리에서 널 불러’
내가 좋아하는 밴드 원위가 군 전역을 마치고 완전체로 모여 낸 첫 앨범 ‘추억의 소각장’ 가사의 일부분이다. 맨 처음 들었을 때엔 너무나 흔한 사랑 노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흘러 가사를 곱씹고 되새기다 보니 흔한 사랑 노래인 듯하면서도, 결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이 밴드의 노래로 말하자면, 영어 가사가 극히 일부분이다. 대다수가 한국어로 적힌 가사라는 점이 내 마음에 들었다. ‘추억의 소각장’ 여러 파트 중에서도 굳이 이 파트를 고른 것은, 아마도 나의 마음과 와 닿는 부분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가 옆에 있을 땐 정작 모르던 것들이 있다. 이 사람이 없어도 잘 해내겠지, 잘 살아내겠지, 하는 감정들이 바로 그런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생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사람의 일부분이 빠지더라도 잘 살아낼 수 있긴 하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갈 수 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에는 아무래도 내 마음의 방 한구석을 내어줬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짧았던 시간이었든 긴 시간이었든 ‘시간’을 함께했다는 것. 그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아가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흔적이 남았기 때문이다. 흔적이 남지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일이, 누군가와 함께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문득 떠오르는 그 사람의 흔적을 곱씹으며 살아가게 된다. 그 사람의 흔적을 되새김질하며, 우리는 이전과 똑같은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그것이 슬픈 기억이라 하더라도, 끝이 좋지 않다 하더라도, 모든 것의 끝에 아픔이 있다 하더라도. 스쳐 지나간 흔적 속에서 우리는 생각보다 꽤 오랜 순간을 헤매게 된다.
하루도 잊은 적 없었다고 말을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사람이 온전히 하루를 누군가의 생각만 하며 보내지는 않을 테니까. 하루 중 어느 순간, 잊고 지냈던 이름 세 글자가 떠오르기도 한다. 찾아도 나오지 않는 흔적을 찾으려 애를 쓴다. 이미 흘러간 것을 그리워하는 건 인간 본연의 습성인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와 닮은 흔적을 찾아서, ‘그’와 비슷한 사람을 찾아서 애쓰고 노력한다. 그런다고 하더라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면서도.
깨진 유리잔을 다시 이어붙인다 하더라도, 물을 부으며 틈새로 새어나오는 물 때문에 더 이상 잔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우리 사이는 이미 한 번 깨졌기에 다시 붙인다 하더라도 똑같을 것이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시간의 흐름이 잔인하다 여기면서도 지나간 인연에 목매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글을 쓰는 순간, 우리가 무엇을 했지, 하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곤 한다. 추억을 태울 수 있는 소각장이 있다면, 나는 제일 먼저 그와의 추억을 태울 것이다. 그와의 추억은 나에게 있어 잔인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각 난 기억 사이로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여전히 날 아프게 한다. 그때가 우리의 인연이 맞닿는 시간이 아니었더라면, 조금 더 지난 후였더라면……. 그랬더라면 우리의 결말은 조금 다른 식으로 펼쳐졌을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할 질문을 던지곤 한다.
잘 지내냐는 안부 인사도 전할 수 없다. 안부 인사를 하기에 너와 나는 너무나도 멀어졌고, 서로 다른 길을 살아온 지 오래되었으니까. 가끔은 네가 보고 싶다는 말도, 가끔은 너와 걷던 길 위에서 울곤 한다는 사실도, 가끔은 너의 흔적에 마음 아파하며 산다는 사실도, 여전히 나는 네가 그립다는 말도, 여전히 너를 잊지 못하고 있단 말도 아무것도 전할 수 없다. ‘너’는 도대체 나에게 어떤 사람이었던 것일까. ‘너’는 내게 있어 단 하나의 사랑이자, 단 하나의 우정이자, 단 하나의 모든 것이었다. 그 말을 직접 네게 내뱉는다 하더라도 너는 믿지 않을 테지만. 너를 잊기 위해 발버둥치던 지난날의 추억이 내게는 고통이었음을, 고통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로 지금 이 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하면 너는 믿을까.
오늘도 난 네 이름 세 글자를 읊다가 또 다시 깨닫고 만다.
너의 추억은 내 죽음의 순간에 아주 짧은 주마등으로 스쳐갈 것임을.
이미 지워진 ‘우리’의 대화는, 죽음의 순간에 그 어떤 장식품조차 되지 못할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