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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안녕 추억 안녕

by 장민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은 내 머릿속에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당시 난 사춘기와 더불어 우울증을 심하게 겪고 있었다. 뇌는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방어를 하기 위해 우울할 때의 일을 희미하게 만든다고 한다. 나의 뇌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그 시절 어땠는지 완전히 잊은 것이다. 사실, 대학교 때라고 하더라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원치 않는 기억들이 조합된 나의 뇌는 그저 쉽게 기억을 잊으려 한다. 정신건강의학과에 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달라졌다. 우울증 약을 먹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을 기록하려는 습관이 생기자, 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금씩 기억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마골피의 ‘비행소녀’를 듣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안녕 기억 안녕 영원히 그대를 사랑해요’라는 노랫말이 후렴구에 계속해서 등장한다. 영원이라는 게 있을까?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 우주 역시 지구에 있는 인간의 시점으로 측정할 수 없을 뿐, 유한하다. 행성에는 나이가 있고, 그게 몇십억 년이든 결국 ‘안녕’을 고할 수밖에 없다. 특히, 지구는 온난화와 기후의 문제로 인하여 앞으로 길어봐야 20년 동안 인류가 존재할 것이라는 학자들의 예측이 있다. 결과적으로 인류는 영원할 수 없고, 영원이란 말은 무색하다. 영원을 믿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희미한 희망을 잡는 것이리라. 인류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늘 갈망했다. 갈망하면서도 인류는 영원이라는 것에 끝내 다다르지 못했다.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류는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삶도, 사랑도, 우정도, 결국 모든 것은 ‘상실’로 귀결된다. ‘상실’ 속에서 인류는 하나라도 더 기억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노력에 그치고야 만다.


“노력하면 할 수 있어.” 노력한다고 모든 감정이 완성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완성되지 않는 감정들도 있다. 정확히는 완벽해지지 못한 감정이다. 우리의 감정은 늘 서툴기 짝이 없고, 사랑에라도 빠지면 첫사랑을 하는 것처럼 군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지금 이 순간이, 지금 이 사랑이, 지금 이 우정이 언제 끝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른다. 그렇기에 질투라는 감정이 생겨났고, 누군가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감정이 생겨났다. 인간의 감정 서사를 들여다보자면 그렇다.


자, 차근차근 돌아가 보자. 음소에서 시작된다. 음소는 결합돼 낱말이 된다. 낱말은 구를 이루고, 구는 문장을 완성한다. 완성된 문장들이 모여 문단이 된다. 문단 속에서 줄거리, 즉, 기승전결이 있으면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우리의 서사를 쪼개서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서사는 미완이라 하더라도, 일부분은 완성되어 있다. 기승전결로 이야기가 완성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서사 중 일부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조각난 채 붙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모든 것을 잊고, 지우려 하고, 그 속에서 결합된 무언가가 없음을 인정하기 위해 살아간다.


우리가 했던 것을 낱말로 설명하자면 ‘사랑’이나 ‘우정’이 되겠고, 혹은 사랑과 우정 사이 어떤 것이 될 수도 있다. 구가 된다면, 문장이 된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조금 더 풍부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과거 시제에서 영원히 멈춰버리겠지. 과거 속에 갇힌 우리의 삶을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데에는 그것들이 과거 시제에만 갇혀 있으니까. 현재는 매 순간 과거가 되기를 반복하고, 과거가 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절망하며 현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인간이 인지하는 것은 0.1초 느린 과거라는 글을 본 적 있다. 사실 내가 무언가 말을 하고 난 뒤라도, 우리가 너와 나라는 낱말로 분해되기까지도 모든 순간은 과거였으며 과거일 것이다.


과거 속에서 우리는 영원히 숨쉬고 있다. 죽음이 덮쳐오는 그때까지도 아쉬운 숨을 삼키며 살아가겠지. 그게 인간이니까. 인간은 늘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고 과거 속에 머물며 지나간 순간들을 그리워하는 존재이니까. 지나간 순간들을 모은다면 그것이 우리의 또 다른 삶이겠지만, 애석하게도 인간은 이후의 것들을 생각하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에만 갇혀서 사는 것이 인간이니까. 그리하여 인간의 삶은 서서히 무너진다. 때로는 파도가 밀려올 때도 있고, 파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잔잔히 부는 바람에도 무너질 수도 있다. 무너짐 속에서 다시 한번 일어나는 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추억 앞에서 바스러지는 인간을 두고 강인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은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추억에 안녕이라고 인사를 하지만, 사실은 나 자신이 가진 모든 것에 안녕을 고하는 건 아닐까.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들이 아니라, 사랑이 아닌 시간들과 나 자신이 오롯이 감당해야만 하는 것들에 인사를 하고 나면 나에겐 무엇이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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