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오아시스를 정확히 알게 된 건 그들이 막 해체하려던 순간이었다. 2007년 어느 날, 친구가 오아시스를 좋아한다고 해서 무작정 오아시스의 노래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wonderwall'이라는 곡에 대한 해석을 보게 되었다. 초월 번역이라고 하면, 초월 번역이겠지만, 동경하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상대에 대한 감정을 wonderwall이라는 새로운 단어로 만들어 표현했다는 네이버 지식인에 달린 긴 답변이었다. 해당 답변은 2007년도의 것으로 기억난다. 그 뒤로 오아시스의 이 곡을 지겨울 정도로 들었다. 그사이 시간은 흘렀다. 나는 타투를 하게 되었고, 타투의 문구로 wonderwall을 택했다. 내 인생을 관통하는 명곡이 있다면, 늘 외딴 사랑만 하는 내게 있어 wonderwall이라는 단어를 대체할 만한 다른 단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wonderwall은 갤러거 형제가 의도를 하고 썼든 의도하지 않았든 어찌 되었든 나의 마음을 울렸다. 지금도 오른쪽 팔꿈치 위에는 wonderwall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오아시스에 한창 빠져 있던 때, 오아시스의 해체 소식을 들었다. 그들이 좋아하는 축구 팀이 우승을 할 때마다 재결합을 바랐고, 재결합을 한다는 카더라가 한창 돌았을 때에도, 리암 갤러거와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도, 나는 재결합을 바랐다. 그러다 결국 재결합 소식이 뜬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오아시스는 한국 내한 콘서트를 확정했다. 당시 록을 좋아하던 언니와 함께 가려고 예매창을 분주히 눌렀지만, 좋지 않은 자리에 비싼 가격을 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 표는 결국 취소했다. 나는 노엘 갤러거를 사랑하던 옛 친구를 생각했다. 그 친구라면 오아시스의 재결합이자 내한 콘서트에 가지 않을까? 아직 오아시스가 내한하기까지는 반년가량 남았다. 그 친구와는 함께한 기억이 많다. 그런데도 우리가 더 이상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할 수 없는 까닭은, 내가 그 친구에게 미안한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아시스의 노래를 일부러 듣지 않는 데엔, 그 친구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내가 삶의 밑바닥을 걷고 있던 시기, 그 친구는 나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랬기에 너무나도 고마웠고, 부담을 안겨줬다. 그 미안한 마음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보냈던 마지막 메시지를 떠올린다. “네 덕분에 많이 고마웠어”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하고 싶은 말은 그보다 많았다. 그 친구를 만만히 봐서 무리한 부탁을 했던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덧붙이고 싶었지만, 친구가 믿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기에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욱여담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생 때 시작된 우리의 인연은 나의 어머니가 암 투병을 시작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이쯤 되면 대충 나의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암 투병을 시작하면서 진행되던 모든 것들이 멈췄다. 웹툰화를 진행하기로 했던 작품은 웹툰화가 첫 번째로 엎어졌고, 웹툰화와 더불어 달콤한 제안을 받았던 작품들은 세상에서 잊힌 채 다른 출판사로 옮겼다. 24시간 고열과 고통에 시달리는 어머니 옆에서 꾸벅꾸벅 졸며 노트북으로 원고를 썼다. 24시간 동안 어머니 곁을 지키며 쪽잠을 잤다. 보호자용 침대는 비좁았고, 어머니를 간호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소설 론칭 일자는 자연스럽게 한 달 정도 미뤄졌다. 세상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비통하던 때였다. 무언가 풀리려고 하던 시점에 나의 모든 일이 꼬였다. 그렇게 꼬인 상황 속에서도 애써 괜찮은 척 연기했다. 출판사들에게 선인세를 줄 수 있냐고 빌었고, 작품 계약을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맺었다. 그러고도 돈이 부족해 정부 지원금을 알아봤고, 주변인들에게 제발 도와달라고 빌었다. 무릎이 닳도록 빌었다. 누군가는 돈이 없다며 거절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사정이 넉넉하지 않음에도 내게 기꺼이 큰 돈을 빌려줬다.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어머니의 치료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을까. 거절한 이에 대한 원망도 남아 있지 않다. 그건 그들의 ‘선택’이니까. 다만, 나에게 감사한 이들과 더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슬플 뿐이었다. 고마운 이들 중에는 오아시스의 오래된 팬이었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에 대한 죄책감으로 나는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오아시스의 노래를 듣지 못한다. 아주 가끔 그 친구와 별거 아닌 이야기를 하면서도 웃었던 때로 돌아가고 싶을 때 오아시스의 노래를 재생한다. 그 친구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우리의 인연은 몇 년 전 끝이 났지만,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궁금하다.
미안하다는 말을 더는 할 수 없다. 미안하다고 계속해서 몇 년째 사과하는 것은 그 친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말간 웃음이 돋보였던 그 친구를 상상하며, 나는 그 친구의 안녕을 바란다.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넓혀준 사람을 쉽게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 친구는 내게 있어 그런 존재였다. 내 비좁았던 세계를 다양한 콘텐츠로 물들여준 사람. 그게 바로 그 친구였기에, 나는 종종 그 친구를 떠올린다. 우리의 시간은 슬픈 결말을 맺게 되었지만, 그런데도 내가 너를 그리워하는 까닭은 내 별거 아닌 말에도 말간 미소를 짓던 네 모습 때문이 아닐까. 너는 나를 원망하고 있어도 괜찮아. 그냥 내가 바라는 것은 네가 행복했으면 한다는 거야. 나의 세상을 넓혀준 몇 안 되는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에.
잘 지내.
어쩌면 우리는 오아시스가 내한하는 콘서트에서 우연히 스쳐갈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던 시간이 흘러가 버렸지만, 그럼에도 난 널 오랜 시간 기억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