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중반을 넘어선 아빠의 치아는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씹는 기능을 하지 못하는 치아를 모두 빼버리고 임플란트를 심어야할 상황이 되었다. 그나마 치아를 심을 수 있는 뼈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뼈를 이식하는 과정이 추가되면 훨씬 힘든 시간이 될 뻔했다.
폭풍 검색으로 알아낸 몇 군데의 치과를 언니가 모시고 다녔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선택된 치과는 우리집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마을버스로 세 정거장,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곳이니 진료는 내가 같이 가게 되었다. 주차 공간이 없고 대로변에 있는 치과라서 대중 교통을 이용해야 하는데, 택시를 앱으로 불러줄 수 있으니 세상 편리하다. 병원까지는 언니가 콜을 하고, 진료가 끝나면 내가 콜을 한다. 아빠는 집 앞에서 타고, 끝나면 집 앞에서 내리면 된다.
나는 그저 우리집에서 시간 맞춰 병원으로 갔다가 아빠의 진료를 보고 택시를 불러주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을 다니던 중, 아빠가 깜빡하고 집 현관 열쇠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된 날이었다. 우리집에도 키가 하나 더 있어서 가지고 올테니 병원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진료시간까지는 4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나는 서둘러 병원을 나왔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서 기다리고 타는 것이 애매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겨울 날씨인데도 달리는 몸이 후끈후끈하다.
아빠에게 열쇠를 주기 위해 달리는 나는 문득 오래 전 기억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3학년 한창 대학 원서를 내고 실기를 보러 다니던 때였다. 지원한 대학이 천안에 있었는데 기차를 타러 서울로 가던 와중에 수험표를 챙기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의 나는 공중전화로 달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엄마에게 전화를 했었다. 연극영화과 지원을 불같이 반대하던 부모님은 시험을 준비하는 내내 차가웠지만, 그 순간만큼은 다급하게 나를 다독였다. 수험표를 가져다 줄테니 예정된 기차를 타고 학교로 가라고 했다. 수험표가 없으면 실기 시험장에 들어갈 수 없는지라 초조하게 부모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험 시간이 십분 즈음 남았을 때, 영화처럼 엄마, 아빠의 얼굴이 보였다. 나를 향해 달려오는 엄마의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엄마는 그때,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급하게 챙겨서 집을 나섰는데 학교에 와서 보니 다른 대학의 수험표였던 것이다. 엄마가 어쩌냐고 울먹이는데, 시험장 앞을 지키던 분이 사진이 있으면 재발급을 받을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우리는 재발급을 받기 위해 다시 뛰었다. 그런 상황이 왜이리 영화같은지 나는 자꾸 웃음이 나왔다. 엄마는 나보다 더 빠르게 뛰며 나를 채근했다. 재발급을 받고 겨우 시간을 맞춰 실기 시험장에 들어갔다. 그 순간은 다시 생각해도 숨막힐만큼 아찔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때만큼 긴박한 순간은 아니지만, 아빠를 위해 달리는 지금이 나는 참 좋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참 행복하다. 그때 나를 위해 달리던 엄마의 마음도 그랬을까.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달린다는 건, 위하는 마음이 절로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 시간이 힘들지 않다면 그 마음에 사랑이 존재하는 것일 것이다.
열심히 달렸더니 진료 시간에 맞춰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빠의 진료가 끝나고 택시를 불러 타는 것까지 보고 다시 집으로 걸어가는 길, 마음이 몽글몽글하다. 예전에는 뭔가 대단한 것들로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하지만 뭔가 준비하기까지 시간도 돈도 충분하지 않을 때가 많다. 요즘은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자고 마음 먹는다. 따뜻한 말 한마디, 따스한 눈빛, 소소한 돌봄 같은 것들을 잊지 않고 챙기려 한다.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다 보면 더 대단한 것들도 해줄 수 있는 날이 올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