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내 맘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내 맘대로 된다고 해도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저녁만 되면 거실에서 나는 티브이소리, 부모님의 싸우는 소리
특히 끊임없는 엄마의 욕하는 소리를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해 수능날은 유난히도 추웠고,
감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폐렴이었던 나는
밤새 끙끙 열로 앓고, 감기약을 먹고, 양말 두 겹을 신고,
열을 식히고자 젖은 휴지를 이마와 뺨에 붙이고 비몽사몽 간에 수능시험을 치렀다.
신의 동정이었을까
초인적인 힘이었을까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대학에 붙었다.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해방이었다.
천국일 줄 알았던 대학은 나의 이상과는 달랐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미치도록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서로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런던에 도착한 이십 대 초반의 청년 둘은
길에서 침대 매트리스 줍고, 원파운드 샵에서 옷과 살림살이를 샀다.
그는 공장에서 일했고, 나는 노상에서 옷장사를 했다.
내 손발은 동상에 걸릴 만큼 시렸고,
그의 몸에선 공장의 기름 냄새가 났다.
하지만 행복했다.
저녁에 함께 한식을 지어먹을 때면
차별 없는 런던의 푸른 공원에서 햇빛을 쬘 때면
현금으로 받은 주급을 베개 밑에 넣고 잠들 때면
온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행복했다.
사랑은 지나갔다.
또 다른 사랑이 왔고, 사랑은 선명한 기억을 남기고 몇 차례 더 지나갔다.
지금으로서는 나 조차도 상상할 수 없지만
신체활동을 참 좋아해서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 대표로 달리기 선수까지 출전했다.
지금은 건강이슈로 관절을 아껴 쓰느라 좋아하는 달리기도 자제하며 근력운동 중심으로 하고 있다.
3대째 기독교 모태신앙으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신을 믿었다.
기도했고, 성경을 공부했고, 어린 나이에 신비 체험을 했다.
절박함이 나를 신에게 가까이 가게 했다.
지금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학 삼아 최소한의 기준으로 삼고 살뿐이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듯
나의 욕망도, 나의 가치관도 변한다.
한 때는 일관되지 못한 나의 모습이 불편했다.
모든 것이 변하고,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단순한 진리가 나에게 해방감을 주었다.
언제든지 변해도 되고,
아니 그 무엇이든 변할 수밖에 없다.
여전히 살다 보면 숱하게 부닥치는 일들이 생긴다.
대부분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이해하지 못한 말을 한다거나, 일방적인 결정을 듣는다거나,,,
욱하는 마음이 올라가다가
일단 멈춤 화를 바라본다.
마음에도 코팅이 필요하다. 연잎차처럼.
진흙에서 자라지만 더러워지지 않는 과학적 비밀은 연잎효과 (lotus effect)에 있다고 한다.
연잎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표면이 매끄럽지 않고 수많은 미세한 돌기들로 덮여 있다고 한다.
이 물방울이 연잎 표면에 완전히 닿지 못하게 만든다.
쉽게 말해, 물방울이 연잎 위에 떠 있는 것처럼 구슬 모양으로 맺히게 되는 것이다.
이 미세 돌기 위에는 왁스 성분이 얇게 코팅되어 있어서, 물에 대한 반발력이 더 강해진다.
이로 인해 물방울은 잎에 퍼지지 않고 구형을 유지하며,
굴러다니다가 이물질을 함께 끌고 잎에서 떨어져 나간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연잎은 스스로를 청소하는 기능, 즉 자기 세정 기능을 가지게 된다.
먼지나 오염물질이 있어도 물방울이 지나가면서 함께 씻겨나가므로,
연잎은 언제나 깨끗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세상으로 나가기 전 마음을 코팅할 필요가 있다.
남들은 눈치 못 채는 투명한 코팅막이다.
다정하지 못한 시선, 날카로운 말투, 어그러진 계획에서 오는
불안함과 두려움
연잎처럼 또르르 오염된 것들을 떨어뜨려 보자
연잎차를 마시며 대문 밖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