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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 Oct 28. 2020

영원한 작별이라는 것

It can never be prepared

오늘은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보낸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그녀를 기리며 1년 전부터 써오던 글인데, 매번 쓰려고 할 때마다 쏟아져 나오던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끝을 내지 못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나에게 이렇게 멋진 친구가 있었다는 걸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좀 더 차분하게 쓸 수 있겠지, 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슬픔의 무게는 줄어들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발행하지 못할 것 같아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로 발행 버튼을 눌러버리는 글.


당신은 소중한 누군가에게 영원한 작별 인사를 한 적이 있나요?




안녕, 내 친구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4살이 많던 한 선배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내 말에 이렇게 답했다. "너는 이제 막 난 파릇한 풀 같아, 아직 뭘 몰라서 하는 소리야. 너도 나이가 들고 세상을 알게 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나이차는 극복하기 힘든 거라 생각했다. 나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오빠나 언니 같은 호칭이 허물수 없는 벽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이가 나보다 많지만 친해지고 싶은 상대에겐 그런 호칭 대신 '~씨' 라던가 애칭을 붙여서 부르곤 했던 것 같다.


이 글은 나이차가 많이 났지만, 친구 같았던 한 사람을 기리기 위한 글이다. 나를 처음 느껴보는 슬픔과 비통에 빠지게 한 사람. 이제는 보고 싶어도 더 이상 볼 수 없고, 궁금한 게 있어도 물어보거나,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이야기할 수 없는 그 사람을 기억하고 싶어서 쓰는 글.


그녀는 나보다 38살이나 많았지만, 나에게 늘 이렇게 인사했다. 'Hej, min ven (안녕, 내 친구)'



Weight of Elephants


그녀는 시어머니였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6년 전, J가 그냥 친구였을 때였다. 코펜하겐 근처에서 전시를 하신다기에 J와 함께 보러 갔었고, 집에 한 번 놀러 오라고 초대를 해주셨다. 얼마 후, 덴마크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J의 고향이 궁금해서 버스로 3시간 거리인 그 도시에 놀러 갔다. 내가 온다고 하자, 이혼해서 따로 사시던 아버지도 오셔서 어머니 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게 되었다.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는 자리는 처음이라 어색하고 긴장됐는데, 채식을 하던 나를 위해 채소 스튜를 만들어주시고, 영화나 책,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영어가 서툴렀을 때라 깊은 이야기는 못했지만 따뜻하게 반겨주시던 느낌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다음 날에는 집 근처 영화관으로 영화를 보러 갔는데, 영화를 보고 나와서 길에 한참을 서서 영화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던 어머니와 J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들의 관계는 특별했다. 엄마-아들의 관계가 아닌, 동등한 인간으로 서로를 대했다.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엄마를 엄마라는 호칭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렀다고 했다.


그녀에게는 넓은 포용력이 있었다. J는 크면서 한 번도 엄마와 다퉈본 적이 없다. 만으로 열세 살쯤 되었을 때 J는 담배와 술을 시작했다. 그의 부모님은 J를 혼내거나 하지 말라고 하는 대신 J의 놀이방을 만들어줬다. 마음껏 친구를 초대해 음악을 듣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실 수 있는 J만의 방을. 평생 동안 J는 부모님에게 뭘 하라거나,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J는 단 한 번도 엄마가 자신을 화나게 한 적도, 화를 낸 적도 없다고 했다. 대신, J가 하는 어떤 선택이든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내고 관심을 가졌다.



그녀에 대하여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녀는 평범해 보였지만, 특별한 사람이었다. 세심하고 사려 깊지만 강했고, 편안하면서 유쾌한 사람이었다.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작은 것에도 진심으로 기뻐하고 고마워했고, 사랑의 표현이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집에 처음 놀러 갔던 날, 선물로 뭘 가져갈까 하다가 나뭇잎 그림을 그려서 드렸다. 잘 그린 그림도 아니고, 가벼운 마음으로 선물한 거였는데 다음번 방문할 때 보니 그 그림을 액자에 고이 넣어서 벽에 걸어두셨다. 무려 7년간 이사를 하면서도 그 나뭇잎 그림은 그녀의 벽을 지켰다. 그녀를 떠나보낸 후 무거운 마음으로 간 텅 빈 집에서, 아직도 벽에 걸려있는 그 그림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받는걸 한 번도 당연해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작고 재미로 주는 선물이라도 진심으로 고마워했고, 그걸 그렇게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그녀의 벽과 선반, 창틀에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받은 선물과 가족들의 사진으로 가득했다.


그녀와 나누는 이야기는 편안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했고, 다른 의견을 내는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관심과 호기심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질문을 하고, 잘 들어주었다.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부담스러운 칭찬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칭찬들. 가족 중 한 명의 생일이 다가오면 다른 가족들에게 리마인더를 해주거나 다 같이 만나는 일을 만드는 것도 늘 그녀의 몫이었다. 내 생일에도 (그리고 생일뿐만 아니라 종종 이유 없이) 늘 선물을 챙겨주셨는데, 평소의 관심과 관찰로 고른 선물은 늘 취향 적중이었다. 


단 둘이 함께 있는 시간도 좋았다. 둘 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고, 현대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미술관을 좋아하지 않는 J를 놔두고, 둘이 현대미술관에 가서 전시를 같이 보고 의견을 나누곤 했다. 친한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 직장 동료에 대한 이야기, 학창 시절이나 지난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하는 시간들이 좋았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녀는 관심 있게 들어주었다. 그녀의 이야기도 늘 흥미로웠다. 단어나 문화적으로 내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집에 놀러 가면 맛있는 것을 해주셨다. 내가 요리를 하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처럼 즐겼다. 그녀와 함께했던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내가 뭘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그녀는 자기가 정말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끼고 좋아한다는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뭘 하든, 내 선택을 존중해주었고 그래서 그녀와 함께라면 늘 편하고 안정감이 느껴졌던 것 같다. 그녀는 나에게 좋은 친구이자, 시어머니이자, 두 번째 엄마이자, 좋아하는 예술가이자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나이가 많았지만, 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조기 은퇴를 한 후, 중년의 나이로 예술 학교에 입학했다. 젊었을 때부터 취미로 해오던 그림, 조각 등을 학교에서 배운 후, 마음 맞는 사람들과 작은 아틀리에에서 작업을 했다. 덴마크의 작은 갤러리들에서 1년에 한두 번씩은 꾸준히 전시를 하셨다. 열광적인 반응은 없었지만,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저 작품을 그 공간에 맞춰 흥미롭게 전시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과정 자체만으로 만족했다. 나는 그녀의 작품이 참 좋았다. 색을 쓰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걸 즐겼다. 그녀의 그림에서는 힘이 느껴졌다. 


우리를 떠나기 불과 1년 전, 한국에 여행을 오셨을 때 4년 만에 다시 찾은 한국이 너무 좋다며 이곳에 몇 달 동안 살아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한국에 같이 살면서 작업도 같이 하고, 전시도 같이 하자는 이야기를 장난 반, 진심 반으로 했었는데.. 그녀는 그 정도로 새로운 경험을 좋아했고, 열려있었다. 한국 여행을 다녀오고 한동안은 김치와 전에 빠져 유튜브로 찾아서 파전을 직접 만들기도 하셨다.


그녀의 마지막은 갑작스러웠고, 모두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힘들어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고통스러웠다.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드리워지는 것을 보는 것도. 내가 아는 모습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을 보는 것도. 


그녀는 마지막까지 멋진 사람이었다. 갑작스럽게 성큼 다가온 죽음이 누구보다도 가장 무서웠겠지만, 한 번도 부정적으로 바라보거나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다.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늘 긍정적인 것을 보는 사람이었다.


덴마크와 한국을 오가던 작년 이맘때. 매번 한국에 돌아올 때마다 마지막일 수도 있음을 각오했다. 언제가 마지막일지 몰랐으므로. 우리는 곧 다시 보자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이틀 후, 내가 한국에 도착한 날 밤. 그녀는 우리를 떠났다. 나를 기다려줬던 걸까.. 나는 그녀가 아직도 너무 보고 싶다.



기억으로만 남는다는 것


내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이 무섭다. 이 글을 쓰면서, 1년 전과 비교해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희미해진 것이 실감이 나 하염없이 슬퍼진다. 그녀를 알고 지낸 시간은 고작 6년이지만, 그녀의 크기는 너무나 컸다. 다시 그렇게 큰 의미를 줄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낯선 덴마크 땅에 무모하게 발을 딛었을 때, 덴마크를 집처럼 느끼게 해 준 것도 그녀였고, 한국으로 무모한 사업 아이디어를 들고 무작정 떠났을 때도 무한 응원과 지지를 보내준 것도 그녀였다.


얼마 전, 불현듯 '1년이 지난 문자메시지 자동 삭제' 기능이 생각나 설마 하며 그녀와의 문자메시지 내역을 들어갔는데 그녀가 나에게 보냈던 따뜻한 문자들이 몽땅 사라진 걸 보고 한참을 허망해했다. 소중한 시간들이, 믿을 수 없는 내 기억 속에만 남아있고 하나둘씩 사라져 간다니..


이제 1년이 지났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그녀를 알고 지낸 시간보다 떠난 후의 시간이 더 길어지게 되는 날이 온다. 그때의 기억은 더 희미해지겠지.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 한마디 한마디를 잊고 싶지 않은데. 안타깝지만 그렇게 되는 날이 오겠지. 구체적인 기억은 희미해지더라도 그녀가 나에게 준 영향, 나에게 그녀가 가진 의미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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