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23
그녀에게 전화해 문득 사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음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내일도 모레도 그녀는 전화기 앞에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요?
사과는 ‘ㅏ’와 ‘ㄱ’때문에 꽤나 각이 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눈물 흘리지 않고 나를 용서해 달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각이 진 말이지 않습니까. 대신 그녀의 집 앞으로 사과 한 박스를 보냅니다. 철 지난 사과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나는 꽤나 진지합니다.
그녀와 함께 등산하던 날이 떠오릅니다. 그녀는 헉, 헉. 숨을 내 쉬며 자기 마음 가는 대로 생겨나고 얽혀있는 바위틈을 척, 척 밟았지요. 나는 그녀가 밟는 길만 따라갔습니다.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서 말이지요. 헉, 헉. 나도 함께 숨을 내쉽니다. 그녀의 숨을 따라서 말이지요.
원하지 않았지만 꽤 많은 부분을 그녀에게 빚진 듯싶습니다. 그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피곤해집니다. 그녀의 가방에서 사과 하나가 댕구르르 떨어지고 맙니다. 나는 그것을 척, 하고 잡으려다 피곤 때문인지 발을 헛딛습니다. 아뿔싸, 그녀가 밟는 길만 따라서 밟는 것이 내 원칙이었는데! 금을 넘었으니 이제는 내가 지옥에 갈 차례입니다.
대롱대롱, 다행히 그녀와 나는 로프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녀의 사과는 저 멀리 낭떠러지 너머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사과는 꽤나 각이 진 종류인 줄 알았는데, 바위틈 사이에 박히기에는 또 너무 둥그렇나 봅니다. 대롱대롱, 나의 지옥은 꽤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나는 괜히 투덜거립니다. 이래서 등산 안 온다고 했는데, 사과도 하나 제대로 못 잡는 나를 왜 데리고 온 거야! 그녀는 말없이 나를 밧줄에 묶고 걸어갑니다. 턱, 턱. 둘 다 떨어질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럴 일이 없도록 그녀가 나를 잘 붙잡고 있거든요. 이게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순간, 밧줄을 끊어내고 싶은 충동에 휩싸입니다. 밧줄 따위 없어도 그만. 떨어지면 그만. 그렇게 생각하니 낭떠러지 아래에는 뭐가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내가 꿈꾸던 커다란 과수원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나무에 폭신이 내려앉으면 다치지 않을 것도 같습니다.
머릿속의 회로가 팽팽, 돌아갑니다. 정답이 나왔습니다. 내 모든 문제의 원인은 바로 이 밧줄 때문이었다고 판명됩니다. 탯줄을 끊어야만 아이가 첫 호흡을 하듯이,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 나는 애앵하고 울고 싶어 집니다. 내 가방을 뒤적, 뒤적 가위를 발견합니다. 싹둑하고 자르려는데 문득 그녀, 뒤를 돌아봅니다.
그녀는 사실 네 발로 걷고 있어서 뒤를 돌아볼 수 없습니다. 여전히 나는 그녀와 대롱대롱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게 그녀인지, 거미인지, 책상인지, 유달리 각진 사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녀가 거미이거나 책상이거나 사과이길 바라는 것은 나의 착각일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도 그녀에게 전화를 겁니다. 판명된 것은 그녀인지 나인지 확인하려 합니다. 마음의 준비는 이미 되었습니다. 뚜뚜, 신호음이 갑니다. 나는 사과를 깎아내어 과도보다 날카롭게 준비합니다. 각지든, 둥글든, 깎아내면 모두 사과인 것은 틀림없지 않습니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휴, 한숨이 나옵니다. 판명된 것은 없습니다. 내가 증오하던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동안 나는 토끼모양으로 사과를 깎는 법을 연습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