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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를 떠나서 아픈 문장이 돼버렸나

250126

by 모래

https://youtu.be/7pGQq3Uppe8?si=JCwTNhIcxUsMZQNa


0.

늘 사람으로 북적이는 대각선 횡단보도를 건너던 어느 날. 문득 사람들 속에서 익숙한 향기를 찾아냈어. 처음으로 함께 영화를 보던 날 내가 좋다고 말했었던, 그래서인지 만날 때마다 네가 잔뜩 뿌리고 나타났던. 깨끗하고 포근하지만 끝맛은 어딘가 쌉싸름한 그 화이트 머스크 향 말이야.


설마 너일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기 전에 향기는 벌써 흩어져 버렸어. 엎질러진 순간, 돌이킬 수 없어진 거야.


알아. 내 사랑은 일방적인 구석이 있어.

사랑의 시차는 내 행동을 조금도 미화할 수 없을 거야. 그래도 그 향기와 마주친 날이면, 나는 이불속에 파묻힌 채 네가 사랑하던 데이먼스 이어를 들어.



1.

이불에서 발을 뺀 채 잠들어버린 새벽, 그 사이를 비집고 온몸 구석구석 스며드는 한기.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안개 같은 새벽. 눈앞에서 가로등 불빛이 깜빡거리고, 여기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명 너의 꿈을 꿨던 것 같은데. 애틋함만 가득하고 너의 모습은 한 자락도 붙잡을 수 없었어. 꿈에서 깨어나면, 나는 너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거야. 미지근한 마음속을 더듬어보며, 그때의 나는 무얼 떠올렸던가. 떠오르는 것이 언어화되기 전에 까무룩 잠들어버렸나.



2.

이번에야말로 너를 미워해야지, 다짐하고 싫은 점만 떠올렸던 새벽. 미워하는 것을 마주해도 왜 눈물부터 나는 건지, 요즘 나는 무엇도 쉽게 미워할 수가 없어. 이럴 때는 바짝 엎드려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


사랑하지만 동시에 같은 이유로 사랑할 수 없는 것들.


살아가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삶과 죽음, 사랑과 미움 사이의 어정쩡함. 조금 무겁겠지만, 이번에도 나는 양쪽 모두를 끌어안고 끝까지 걸어가 보려고.



3.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냐. 무엇보다 손에 잡히는 사랑을 원해. 네가 나를 이해해 주고, 너만이 나를 이해해 주고. 그렇게 소리 내어 말하는 어딘가 폭력적인 면이 있는 사랑. 피부에 닿으면 화들짝 놀랄 정도로 서늘한 온도의 사랑.


결단코 화해할 수 없는 누군가만을 나는 사랑할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랑만이 지독히도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고.


그래서 네가 사랑을 속삭였을 때, 나는 너를 부숴버리고 싶었어. 너의 코를 비틀고 눈을 찌르고 싶었다고.



4.

그때의 나는 일종의 예감이 있었어. 만나는 순간, 나는 너와 천천히 이별하고 있던 거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헤어지고 싶지는 않으니까. 우리의 이별은 만남만큼이나 특별해야 해. 부모님과 떨어져 처음으로 유치원에 보내진 아이가 외로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외로워하듯. 언제나 처음인 양 한껏 외로워할래.


우리가 함께 비를 맞고,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새벽을 달렸지만. 내가 너의 무릎을 베고 눈을 감고, 너는 앉아서도 눈을 감았지만. 그때의 너는 여전히 화이트 머스크 향을 풍겼고, 우리가 좋아하던 데이먼스 이어가 흘러나왔지만.


하지만, 한 가지.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



5.

사랑해서 아픈 게 아니라 아파서 사랑했던 시절. 배신만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무언가였다고 믿어. 지금도 믿고 있지. 영원히 이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도, 화이트 머스크 향을 맡으면 그 시절에 갇힌 네가 떠오르겠지. 데이먼스 이어를 들어도 마찬가지일 거야. 우연찮게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날엔, 꿈에서라도 네가 나타나길 빌지도 모르겠어.

...

그 꿈은 악몽일까?


아주아주 나이가 많이 들어서, 그때의 나는 슬퍼하는 것 말고도 잘하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 조각조각 부서진 네가, 갈기갈기 찢어진 네가 아니어도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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