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09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만 세상을 바라보다가 나 혼자 일어서 걷는 순간, 그건 내가 알던 세계의 「종말」이다. 세계를 보는 눈높이기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눈높이는 쑥쑥 큰다. 인간은 어릴 때부터 나름의 「종말」과 마주한다.
너무 높아진 눈높이에 익숙해질 때쯤, 세상은 인간에게 겸손해질 기회를 준다. 어쩌면 너무 빨리 세상을 알아버리는 것이 인간의 미덕인지도 모르겠다. 눈높이가 다시 낮아질 때. 그때 또다시 「종말」이 찾아온다. 나는 다시 기대하고 또 실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이 든다는 이유만이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게의 나이 든 인간들은 각자의 「종말」 상태에 처해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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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내 것이라 느꼈던 모든 것들이 때로는 누군가의 무덤에서 도굴해 온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인생 전체가 맞지 않는 옷처럼 말이야.”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저러다가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테야, 생각하면서도 참을 수 없는 미움이 치고 올라온다. 묵묵부답인 그를 세워두고 나는 계속 말한다.
“하지만, 있잖아.
무균질의 삶은 없다는 걸 나도 알아.”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 그다.
시간을 두고 마음껏 기억을 헤집어본다. 사랑하던 기억도, 증오하던 기억도 모두 흩어져갈 때 남은 것은 약간의 씁쓸함.
”나는 그래도... 조금 더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을 찾고 있어. “
이 말을 내뱉고 나는 이상한 종류의 해방감에 사로잡힌다. 역할을 제대로 마친 배우가 연극무대에서 내려오듯, 내 안의 어떤 욕망을 토해냈다는 해방감이다. 그 순간 거기에 그는 없고 나만 있다. 나는 연극적인 기분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렇지만 말이야...
우리가 함께한 그 시간들은 그럼 「종말」인 거야? “
그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 뒤의 어디쯤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시선이 정확히 어디를 향하는 지 알지 못한채 말한다.
”그래. 일종의 「종말」이지.”
그는 천천히 굽힌 등을 펴낸다. 마치 인류의 진화를 보는 것만 같은 느릿한 속도이다. 지금의 그는 새롭다. 지난 수년간 알아온 그가 아닌 것 같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그는 다시 완전히 일어서서, 이제는 내 쪽으로 걸어온다. 나는 당혹감을 느낀다.
“나는 무수한 「종말」을 봤어.
지구의 종말도, 사람의 종말도. 결국 시작은 같았어.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으로부터 이 모든 것이 시작된 거야.
그렇지만 나는 지금 너에게서 달려 나갈 거야.
그럼 너는 다시 한 사람이 되겠지.
그러면 오늘 너의 「종말」은 깨끗하게 없었던 일이 될 거야. “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가까이서 보는 행성의 움직임처럼 천천히,
그러나 멀리서 보는 행성의 움직임처럼 빠르게.
이제야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는 하나의 「행성」이었다. 그 순간 나는 그 사실을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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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에 들어가 숨을 참는 연습을 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 내 옆사람을 앞지르는 연습도 했다. 가방을 메고 모르는 곳의 지도를 챙겼다. 처음 그에게 뛰어들던 나를 생각한다.
발 디딜 곳이 사라져도 뛰어넘어야 할 곳은 남아있다.
아무리 캄캄하고 우주처럼 광활한 어둠 속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