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샤인 메도우(Sunshine Meadows)에는 꼭 가고 싶었다. 두 팔을 뻗고 빙빙 돌았을 때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는,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초원을 걸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JustGo 세계여행-캐나다 편>에서 무려 레이크 루이스 다음으로 소개되는 위엄을 토하는 이 곳. 처음 여행을 계획했던 1년 전부터 내 버킷리스트에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처음 갔던 날은 눈이 덜 녹아 다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밴프에서 캘거리로 숙소를 옮겼지만 다시 밴프로 향했다. 렌터카 조수석에서 본, 저 멀리서 로키 산맥이 형체를 드러내던 뷰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다. 에드먼튼에서 재스퍼 국립공원으로 진입할 때 만나는 로키와 캘거리에서 밴프 국립공원으로 진입할 때의 로키는 모습이 완전히 달랐다. 에드먼튼-재스퍼-밴프를 종단하는 93번 도로에서는 키가 어마어마한 산들이 우리를 양 옆으로 감싸는 모습이지만, 캘거리에서 밴프로 횡단하는 Trans Canada Highway 1번 도로에서는 거대한 로키 산맥이 내 전면에 가로로 길게 펼쳐진다. 수평선도 지평선도 아닌 산평선이라고나 할까. 어디가 끝인지 모를 산맥의 장대함에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Trans Canada Highway 1에서 밴프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길
밴프 다운타운을 거쳐 도착한 선샤인 빌리지(Sunshine Village)는 로키 TOP 3 스키장 중 하나지만 여름철의 하이킹 코스로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여름용 곤돌라는 6월 말부터 9월 초까지 운영되는데, 7월 중순까지는 해빙기라 트레일이 불규칙적으로 열리므로 홈페이지에서 Trail Report를 미리 확인하고 가야 한다.
우리 가족은 <곤돌라와 리프트를 타고 고산 초원지대로 가서 Sunshine Meadows Trail 하이킹을 하고 이 곳의 가장 상징적인 호수인 Rock Isle Lake를 보는 간단한 코스>를 계획했다. 세 개의 고산 호수(Laryx Lake, Grizzly Lake까지 포함) 모두를 찍는 더 길고 어려운 코스도 있지만, 아이 둘과 함께 걸어야 했기 때문에 왕복 3km 남짓의 이 코스가 적당할 것 같았다.
곤돌라와 체어리프트(Standish Express Chairlift)
곤돌라를 타고 우람하게 솟은 침엽수들 사이를 30분 정도 통과했다. 빌리지 터미널에 도착하니 바람이 너무 강해서 몹시 추웠다. 애들도 모두 춥다고 난리를 친다. 모두 바람막이만 걸친 상태였는데 패딩재킷을 가지러 다시 차에 가야 되나 싶었다. 스태프에게 위쪽 날씨를 물었더니, "바람이 세지만 햇빛이 무척 강하니 여러 겹의 옷을 입는게 좋다"고 원론적인 답변을 한다. 스태프 본인은 정작 두꺼운 기모 재킷을 입고 있어 내 불안이 증폭되었지만 방법이 없다. 걷다보면 몸에서 열도 나고 어떻게 되겠지.
체어리프트를 타고 산 중앙에 둥둥 떠서 올라가다보니 점점 사방이 조용해지다 어느 순간 완전히 적막 속에 잠겼다. 아들이 책에서 읽었다는데 '사람은 무음실에 들어가면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귀는 위험을 감지하기 위해 발달한 것인데, 귀가 그 기능을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포를 이기기 위해 유투브로 '빨간내복야코' 시리즈를 듣거나, 아빠표 브이로그를 찍는 등 우리 가족만의 추억을 만들었다.
약 10분 후 목적지에 내렸다. 이곳은 해발 2400m로 로키 남부 지역에서 리프트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한다. 이미 삼림한계선을 지나서 키 큰 나무들은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 고산지대에 진입한 것이다. 이 얘기를 하니 아들이 갑자기 숨 쉬기가 힘들다고 한다. 설마 말로만 듣던 고산병일까? 그런데 이내 곧 적응되어 괜찮다고 한다. 진짜 저산소증을 느낀 건지, 높은 데 왔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발생한 노시보 효과인지는 모를 일이다.
잘 다듬어진 자갈길을 잠시 걸어 스탠디시 전망대(Standish Viewing Deck)로 갔다. 아까 1번 국도에서 2차원으로 맞이한 장엄한 로키 산맥들이 이번에는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에 360도로 펼쳐져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풍부하고 황홀한 풍경이었다. 어시니보인 산, 스파 산, 심슨 강... 푸른 하늘, 흰 구름, 산등성이의 흰 눈, 신록의 푸르름과 코발트 빛 호수까지. 이 세상에서 가장 조화로운 색깔들만 모아놓은 것 같다. 여기가 무릉도원 아닐까. 저 아래 신선들이 살고 있지 않을까.
이곳을 걷는다는 흥분에 서둘러 하이킹을 시작했다. 이곳은 대륙분할 지점(Continental Divide)에 있기 때문에 내딛는 한걸음에 앨버타 주에서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를 오고 갈 수 있다. 그저 땅의 한 지점에 불과한 줄 알면서도 '대륙의 경계'라는 가치를 더하면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든다.
곰이나 사슴을 조심해야 할 정도로 야생적인 곳이지만 하이킹 코스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가파른 내리막길도 꽤 있지만 듣던 대로 아이들도 충분히 걸을 만했다. 많이 걷다 보니 어느새 바람막이도 벗고 반팔차림이 되었다. 뜨거운 햇살에 가방에 넣어온 에너지바들은 이미 녹은 지 오래다. 곰 딸랑이 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초원을 가득 채웠다.
아직 눈이 완전히 녹지 않은 땅에는 야생화들이 피기 시작하고 있었다. 가혹한 자연조건을 견뎌야 하는 식물들은 자신만의 생존전략이 있다고 한다. 고산 지대의 꽃들이 키가 작고 땅에 붙어 자라는 것은 바람의 영향은 덜 받고 햇빛의 영향은 더 받기 위해서다. 방문 시기마다 볼 수 있는 꽃들도 다를텐데, 이 때는 노란 웨스턴 아네모네가 많이 피어 있었다. 가까이 코를 대어보니 별다른 향기는 없다. 세찬 날씨를 이겨야 하는 들꽃들에게서 향기 대신 소박한 생명력이 뿜어져 나왔다.
스탠디시 전망대 - Rock Isle Lake - 웨스턴 아네모네
이렇게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쯤이면 걷는 동안 내내 마음을 어지럽히던 수만은 생각의 갈피들도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머릿속이 말갛게 비워진다. 아무런 상념도 없이 무심하고 담백한 눈으로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이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이 찰나의 비워짐을 잊지 않는 한 걷는 행복을 포기하지는 못할 것 같다. 김남희, <산티아고 가는 길> 중에서
어느덧 목적지, 이름처럼 바위섬을 품고 있는 Rock Isle Lake에 도착했다. 전망대에서 볼 때부터 반했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호수는 더 작열하는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바위 사이 흙을 파내어 찾아낸 보석 같다. 호숫물을 뜨면 터키석이 한 움큼 손에 쥐어질 것 같다...고 하면 너무 오글거리려나. 물빛이 정말 반짝거리는데 어떡하나. 의무적으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벤치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Rock Isle Lake
인간은 걷는 만큼 존재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은 걷는 만큼 존재한다"고 했다. 어떤 맥락에서 한 말인지 잘은 모르지만, 하이킹을 하며 이 말이 생각났다. 험난한 길이든 평탄한 길이든 걷다 보면 내가 만나는 길이 내가 된다. 나는 많이 걷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십년 전부터 하이힐은 거의 다 버렸고 단화나 운동화 위주로 신게 된다. 늘 운동화끈을 단단하게 묶은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 이동하지 않으면 내려가는 리프트를 못 탄다고 Park Canada 직원이 뛰어다니며 안내하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야 하나보다. 오늘 늦게 출발한 바람에 여기서 더 시간을 못보낸 것이 무척 아쉽다. 하산하며 다짐했다. 10년 후에 꼭 다시 와야지. 오늘 못 가본 다른 두 개의 호수도 돌아보고. 아침 일찍 도시락을 싸서 출발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