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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인 Jan 13. 2023

예상치 못한 것들과의 조우

@ 밴프 다운타운


Birthday Girl


아이들의 여름방학에 맞춰 로키 산맥이 있는 앨버타 주로 갔다. 밴프 곤돌라를 타는 날은 딸아이의 생일이었다. 몇 주 전 여름이는 친구 생일파티에 다녀온 참이었는데, 친구 수십 명이 왔던 그날을 두고두고 부러워했다. 그날 사진을 보면 여름이의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왠지(엄마 눈에만) 처연하다. 작년에는 오빠가 코로나 의심증상이 있어 파티를 못했고, 올해도 생일을 끼어 여행을 가자니 딸내미는 더 속상해했다. 어른들에게 "너 생일파티할래, 밴프 갈래?" 하면 대부분 밴프를 택하겠지만, 애들 마음은 그렇지 않다. 진실을 말하자면, 내향형 어미는 캐나다 친구들과 그 부모님들을 집에 초대하는 것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은 생일상은 디저트가 나올 런치 뷔페.


아침에 숙소를 나서기 전 오늘의 주인공은 1달러 샵에서 산 핑크색 "Birthday Girl" 배지를 가슴팍에 야무지게 달았다. 온 세상에 자기 생일을 알리고 싶은 자, 이런 노골적인 배지를 마다하지 않는 자, 바로 9살이다. 덕분에 그녀는 이 날 전 세계인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곤돌라를 태워주는 직원, 같이 줄을 서던 외국 여행자들, 뷔페에서 고기를 썰어주던 요리사도.


설퍼 산(Sulphur Mountain) 정상의 식당은 예약한 보람이 있었다. 소고기 구이가 맛있었고 단풍기가 펄럭이는 뷰도 훌륭했다. 그러나 배가 불러오자 나는 팁을 얼마나 내야 하나 고민이 시작됐다. 캐나다 식당에서는 일반적으로 15~20%의 팁을 내고 있지만, 뷔페는 처음이라... 서빙도 내가 했고, 음식값도 온라인으로 이미 지불했는데? 호구도, 인색한 코리안도 되고 싶지 않아! 테이블에서는 얼마나 냈을까 힐끔거리는데 갑자기 서버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온다. 그리고 아이 앞에 초콜릿 케이크를 내밀었다.

Happy Birthday! This is for you.


아.. 겸연쩍은 웃음이 났다... 난  때문에 고민했는데... 쿨하지 못해 미안해.


* 이후 구글링 결과, 뷔페식당에서 팁은 15% 이하도 OK. 10%가 적당하다고 한다.


Northern Lights에서


써밋 전망대에서


예상하지 못한 선물은 그만큼 기쁨의 순도가 높다. 공연도 뜻하지 않게 만날 때 더 감동적인 것 같다. 전망대에 가려고 한 층 위로 올라갔는데 게릴라 콘서트가 한창이었다. 20명 남짓의 아마추어(?) 밴드, 밴쿠버에서 온 <North Shore Celtic>이라고 한다. 중세 유럽 분위기의 켈트 족 민요를 연주하고 있었다. 발로 까딱까딱 박자를 맞추며 경쾌하게 활을 놀리는데 너무 신나 보인다. 바이올린의 선명하고 깊은 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다. 유명곡의 커버곡과 자작곡들도 나왔다. 정해진 사회자가 없이 연주자 중 몇 명이 돌아가며 멘트를 했다. 팬데믹 동안 공연을 못해서 아쉬웠지만 자작곡을 만들며 위로받았다고 한다. 아무리 봐도 10대 학생들 같은데, 이렇게 곡을 쓰며 연주하는 재능과 열정이 기특했고, 무엇보다 공부에 찌들지 않은 자유가 부럽게 느껴졌다. 아름다운 선율을 듣고 있으니 주책스럽게 눈물이 났다. 휴직을 하고 우울한 겨울을 거쳐 가족과 함께 하는 선물 같은 시간이 새삼 감격스러웠다. 연주자의 발 밑에 놓인 팁바구니를 보고 이번에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관람료를 냈다.


결국 로키를 보고 가는구나


공연이 끝난 후에야 본격적으로 써밋 전망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장관이다. 케스케이드 산, 런들 산 등 수천 미터의 산들이 내 눈높이에서 파노라마를 그리고 있었다. 보우 강의 긴 물줄기도 한눈에 잡힌다. 감탄을 멈추지 못하며 전망대를 죽 돌았다. 재스퍼에서는 내내 날씨가 흐렸는데, 이제 하늘을 가리던 구름들도 걷히기 시작하는 거 같다.

밴프 곤돌라 써밋 전망대


아기 사슴의 첫걸음


밴프 다운타운을 돌아다니다 숙소로 돌아왔다. 빨래를 하려고 옆건물로 걸어가는데, 앗! 도로 건너편에 엘크 가족이 어슬렁거리는 게 포착되었다. 빨래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급히 카메라를 꺼냈다.


이 야생의 가족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어미처럼 보이는 엘크 한 마리도 나를 멀뚱히 쳐다본다. 나한테 어디서 왔냐고 묻는 것처럼. 동네지만 그래도 나름 다운타운인데 이런 곳에서 야생동물들과 대면하다니. 이런 게 밴프매력이구나! 오늘은 그야말로 One sweet and wild day다. 


* 나중에 로키 지역 매거진에서 엘크의 분만시기와 관련한 기사를 읽었다. 밴프 지역의 엘크들은 매년 5월 15일부터 6월 30일까지, 터널 산(Tunnel Mountain) 서쪽 경사면에서 주로 분만을 한다. 분만 후 초기에는 아기 사슴을 덤불과 관목에 숨겨 두고 경계를 선다. 아기 사슴은 태어난 지 일주일 정도면 걸을 수 있고, 3주쯤 지나면 밖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이때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숲길보다는 탁 트인 길을 선호한다. 사람을 포식자로 보는 엘크와 공존하기 위해 Park Canada에서는 이 맘 때 Tunnel Mountain Trail의 일부를 폐쇄하기도 한다.


내가 엘크 가족과 만난 곳이 Tunnel Mountain Road였다. 그들은 어쩌면 몸을 푼 지 얼마 안 된 어미와 이제 바깥세상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기 사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엘크 가족이 오래 행복하기를!


멀뚱멀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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