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레인 Nov 23. 2022

우리도 사랑일까

@ 루이스버그


원래는 노바스코샤 끝자락의 루이스버그(Louisbourg)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여행 거점인 리팩스에서 차로 5시간이나 더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이프 브레턴 섬은 현지인들이 많이 추천하는 곳이었고, 더 들여다보니, 이 섬에 있는 작은 도시 루이스버그가 내 인생영화의 배경지였다.

 


우리는 사랑일까


2019년 여름의 나는 화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선후 관계를 알 수 없는 육아 스트레스까지 더해져 늘 불안과 짜증이 치밀어 오른 상태였고, 이는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몇 차례 상담을 받기도 했다. 첫 상담을 다녀온 날 밤, 올레 TV에서 우연히 이 영화를 골랐는데 신기하게도 그동안의 나의 불안에 대해 약간의 답과 많은 위안을 얻은 것 같다.


2012년 캐나다 영화 <우리는 사랑일까>프리랜서 작가 마고는 다정한 남편 루와 함께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리고 있다. 일로 떠난 루이스버그 여행길에서 그녀는 우연히 대니얼을 만나고, 두 사람은 서로 강하게 끌린다. 토론토로 돌아오는 길에 마고는 대니얼이 바로 앞집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편에 대한 사랑과 대니얼에 대해 커지는 마음 사이에서 그녀는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장면 하나.

썸남 대니얼이 대낮에 술을 시켜놓고 유부녀 마고에게 속마음을 말한다. 대니얼이 혼자만의 상상을 말하는 장면인데 듣다 보면 (조금 민망해지면서) 내가 마고가 된 것처럼 심장이 쪼그라든다. 대니얼은 모두 과거형으로 말하는데, 현실에서 갈망하는 것이지만 윤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정(定)의 언어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니얼이 마지막 고백을 뱉는 순간, 마고는 처음엔 놀랐다가 곧 폭소를 터뜨리는데 TV를 보는 나도 똑같은 감정이었다. 긴장이 확 풀리며 전율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장면 둘(스포일러 주의).

이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라 이게 엔딩씬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아니었다. 텅 빈 새 집에서 마고와 대니얼이 키스를 하면 공간이 360도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수위가 높은 장면들이 순서대로 나오다가 마지막에 손때 묻은 가구들을 배경으로 두 사람이 권태롭게 TV를 보는 장면에서 멈춘다. 새로운 것도 결국 낡은 것이 된다는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이다. 이때 배경음악이 <Take This Waltz>로 이 영화의 원제이기도 하다.


장면 셋.

마고는 불안이 많은 사람이다. 불안이 너무 심해서 비행기 트랜스퍼를 할 때 장애인인 척할 정도다. 나도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도가 높기 때문에 영화 초반부터 마고에게 빠르게 감정이입이 된 것 같다. 마고는 더 이상 설렘이 없는 결혼생활을 결핍으로 느끼고 그걸 채우기 위해 고통스럽게 남편과 헤어진다. 하지만 설렘(=결핍을 매꾸는 것)도 언젠가는 결국 무뎌진다는 걸 깨닫는다. 이쯤에서 마고의 시누이가 하는 말이 내가 찾던 답이다.


"큰 그림에서 보면 인생에는 원래 빈 틈이 있어. 그냥 그런 거지. 그걸 채우려고 너무 애쓸 필요는 없어"

(In the big picture, life has a gap in it. It just does. You don't go crazy trying to fill it.)


나의 부부 관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는 남녀 간의 애정 문제로 함축되었지만, 감독은 결국 '인생의 공허함'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우리는 애초에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너무 바둥대며 살지 말자. 전남편 루의 장난은 내가 이미 갖고 있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해준다. 작년에 직장 내 진로 문제로 고민 중일 때 부서장님이 했던 얘기와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세상에 좋은 선택이라는 건 없어. 내가 한 선택을 좋은 선택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중요한 거지"


영화의 세 장면



루이스버그 요새

Fortress of Louisbourg National Historic Site


케이프 브레턴 섬의 바덱 숙소에서 차를 두 시간 정도 타고 루이스버그 요새에 도착했다. 이 요새는 18세기에 프랑스군이 건설한 곳인데 그 당시의 생활모습을 완벽하게 보존 중이다. 요새 곳곳에 있는 직원들은 그 시대의 가발과 옷을 걸치고 각자가 병사나 방앗간 주인 같은 인물이 되어 방문객들의 시대 체험을 돕는다.


영화에서 마고는 이곳에서 대니얼을 처음 만난다. 그녀는 관광책자에 실릴 글을 쓰러 왔다가 대니얼의 오지랖으로 원치 않는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이 프로그램이 'Prisoner of the Day'인데 내가 갔던 날도 마침 운영되고 있어서 재미있게 봤다.


* Prisoner of the Day : 죄인을 마을에 끌고 다니면서 공개적으로 망신과 벌을 주던 당시 관습(Public Punishment)을 재현하며, 관람객들이 직접 채찍질을 하는 사람으로 참여할 수 있다.


근엄한 판사와 병사의 무리가 고개를 푹 숙인 죄인을 앞세우고 길을 걷는다. 곧 재판이 있을 거라고 동네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알리면서. 지나가던 방문객들은 자기도 모르게 구경꾼이 되어, 죄인을 향해 "Shame on you! Shame on you!" 라며 손가락질을 하고, 병사들의 행렬에 따라붙는다. 죄인 역시 실제로는 이곳의 직원으로 잠시 그 역할을 하는 것뿐인데, 집단적으로 굴욕을 당하는 걸 보자니, 참 쓸데없는 연민이 발동하기도 했다. 이윽고 행렬이 성곽에 도착하면 죄인을 단상에 세운 뒤, 검사 격인 사람이 그의 죄를 장황하게 읊는데, 뭐 심각한 잘못도 아니다. 셔츠인지 빵 따위를 훔쳤다는 것이다. 이날은 다행히 판사의 넓은 아량으로 죄인은 매를 맞지 않고 풀려났다. (영화에서는 관객이었던 마고가 매를 때린다...)

왼쪽에 고개 숙인 흰 모자가 죄인


파크 캐나다는 국립공원뿐만 아니라  캐나다 전역의 국립사적지를 관리하고 있다. 동부에 있는 사적지의 많은 수가 대부분 요새(Fort나 Citadel)인데, 그중 루이스버그 요새는 압도적인 규모와 아름다움, 특색 있는 체험 프로그램들을 자랑한다. 당장 근처 핼리팩스 시타델과만 비교해도 몇 배나 더 크고, 머스켓 발사라던지 술 시음 같은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많았다. 

루이스버그 요새



루이스버그 등대

Louisbourg Lighthouse


애틀랜틱 캐나다에는 150개가 넘는 등대가 있는데 어떤 이들은 이 등대 투어만 따로 하기도 한단다. 나는 미리 <Lighthouse in Atalantic Canada>라는 사진집만 훑어봤었다. 요새에서 차로 20분 이동해서 캐나다의 가장 오래된 등대 중 하나인 루이스버그 등대에 도착했다. 마고가 대니얼에게 30년 후에 다시 만나자고 한 곳이다. 바로 옆의 트레일을 따라 걸으니 오른편 아래로 대서양이 물결친다. 탁 트인 바다의 파도소리가 마치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서정적이었다. 

Louisbourg Lighthouse Trail


Take This Waltz


이 영화의 원제이자 주제곡인 <Take This Waltz>를 빼놓을 수 없다. 루이스버그로 가는 길에 들렀던 몬트리올 다운타운에는 이 노래를 지은 캐나다 국민가수이자 음유시인, 레너드 코헨의 벽화가 있다. (몬트리올 미술관에서 쉽게 보인다.) 왜 영화의 제목이 되었을까? 왈츠는 4분의 3박자의 경쾌한 춤곡이다. 이 불완전한 인생을 쿨하게 견디라는 가벼운 위로가 아닐까.

Leonard Cohen Mural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