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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인 Nov 28. 2022

정우성, 이정재를 실제로 보다니

@ 엔터테인먼트 디스트릭트


다운타운 토론토는 맨해튼, 시카고에 이어 북미에서 세 번째로 고층빌딩이 많은 곳이다. 그런 것 치고는 별로 화려하지 않은 스카이라인이지만 건너편 토론토 아일랜드에서 보면 꽤 운치가 있다. 이 중 토론토의 랜드마크 CN 타워가 있는 곳이 Entertainment District라는 곳이다. 각종 극장과 아쿠아리움, 류현진의 블루 제이스가 경기하는 로저스 센터 등 오락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매년 9월에 열리는 토론토국제영화제의 레드 카펫이 깔리는 곳이기도 하다. 나도 영화제를 맞아 오직 자막 없이 영화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이곳에 왔다. 오늘 스코샤뱅크 극장(Scotiabank Theatre Toronto)에서 볼 영화는 이정재 감독의 <헌트>.

Toronto Skyline과 TIFF 싸인


관객들이 대부분 한국인일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로 극장 안은 만석이었다. <오징어 게임>의 인기 덕분일까, 저 사람들은 영어 자막을 읽어야 되겠구나 싶었다. 같이 온 P가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어제 이정재가 뉴욕에서 에미상 받았잖아. 아마 오늘 토론토로 왔을거야. 분명히 오늘 무대인사 올라온다." 과연? 영화 시작 직전, 영화제 프로그램 디렉터가 무대로 올라오더니 "오늘 서프라이즈가 있습니다. 영화가 끝나면 감독과 주연배우를 만나시게 될 겁니다." 라고 한다. P의 의기양양한 미소와 동시에 관객석에서 환호가 터져나왔다. 




영화가 끝난 후 예고대로 이정재와 정우성이 무대 위로 나왔다. 내가 지금까지 실제로 본 연예인은 컨츄리꼬꼬랑 김제동 밖에 없는데, 한국에서도 못 본 이정재, 정우성을 캐나다에서 보다니! 정우성은 가까이서 보면 후광이 비친다 누가 그러지 않았나?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는 뒤에 있던 내 자리에서 앞쪽 무대 근처로 슬금슬금 기어나갔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관객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쩌다 보니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은 기도 자세로 앉게 됐다. 이래서 실물 <영접>이라 하는 건가. 후광까지는 못 봤지만 두 배우 모두 그들만의 강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그렇다. 이 정도 미모는 돼야 백바지를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중년의 미모 발사


객과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 두 분은 배우로서 오랜 시간 함께 했는데, 오랜만에 같이 영화를 찍으니 어떠셨나요.

-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 역할을 하면서 가장 도전적인 과제는 무엇이었나요.

-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한국사의 험난한... 현재의 한국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판단하십니까.

관객들 질문이 만만치 않았는데, 그 중 이정재의 답변이 기억에 남는다.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나라들이 그들만의 굴곡진 역사가 있으며 각자의 인식과 배경에서 영화에 공감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솔직히 이정재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미 잘 나가는 영화배우니 연기나 제작만 해도 될 텐데 감독에 도전했고, 프트한 로맨스 시작할 수 있었을 텐데 첩보 액션물로, 그것도 과거사보다 예민한 현대사를 주제로 선택한 베짱이 멋있게 느껴졌다. 영화 자체도 재미있었고, 캐나다에서 한국영화를 본 것, 한국 슈퍼스타를 만난 것, 비한국인들에게 한국문화가 인정받는 걸 가까이서 보는 것, 모든 게 다 좋았다.


다만 옥에 티 한 가지. 함께 영화를 본 P가 관객과의 대화 중 통역에 불만이 있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을 Gwangju Citizen Massacre이 아닌 Gwangju Citizen Uprising으로 통역한 것. Uprising은 한국어로 '반란', '봉기', '폭동'에 가깝고, Massacre는 '대학살'의 뜻이다. 그동안 여러 맥락에서 Gwangju Democratic Uprising, Democratization Movement, Gwangju Massacre 등 다양하게 번역되어 온 사건이긴 하다. 하지만 영화제 공식 자막에서 Massacre가 선택되었는데도 그와 다른 예민한 단어가 선택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정재 감독도 '학살'에 방점을 두며 광주시민의 고통이 잘못 전달되지 않을까, 오래 고민했다고 언급했었다. 정확하지 않은 용어 선택으로 다른 배경지식이 없는 관객들이 이 사건에 대해 오해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정우성이 맡은 김정도의 동기에 대해 공감하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P는 곧 이런 우려를 표시하기 위해 손을 들었지만 Q&A 세션 막바지라 발언 기회를 얻지 못했다. 


* 그날 밤 P는 TIFF의 책임자에게 항의 이메일을 보냈고, 몇 주에 걸쳐 회신을 재촉한 끝에 마침내 책임자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영화 <헌트> 상영 후 관객 Q+A에서 이 감독님의 언어 해석에 있었던 오해에 사과드립니다. 이 특정 사례에서 우리는 한국 영화 연구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Upris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 통역사의 결정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여전히 잘못된 번역임을 인식하고 이를 번역 회사로 가져가 상황을 개선하고 교육하는 기회로 사용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이러한 오류가 반복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극장을 나와 점심을 먹기 위해 퀸 스트리트와 존 스트리트 사이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내 자리 건너편으로 CTV 건물이 보였는데, 외벽에 시선을 끄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뉴스 트럭이 벽을 뚫고 앞으로 튀어나가는 모습인데, 현장을 외면하지 않고 진실하고 빠르게 보도하겠다는 다짐일까. 하지만 이런 의지가 무색하게도 사실은 캐나다 뉴스를 보며 종종 웃을 때가 있다. 주말 뉴스 헤드라인으로 "오늘 미스터 스미스의 반려견 잭을 놀이터에서 찾았습니다.", "여러분의 주말 계획은 무엇인지 들어볼까요?" 같은 게 나올 때다. 이런 것이 사건이 되는 캐나다의 무사평탄함이 부럽기도 하다. 


집으로 돌아와 오래 읽지 않은 역사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마침 오늘 본 영화와도 맥이 닿는 부분이 있어 일부를 남겨 둔다. 타국에서 한국 뉴스를 접하면 늘 마음이 답답하다. 어느 시점에서는 분명히 퇴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길게 보면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고 싶은데, 특히 좋은 언론인과 예술인들을 만날 때 그런 희망과 자부심을 갖게 된다. 오늘은 토론토의 다운타운에서 예기치 않게 우리 현대사를 생각하게 된 소중한 하루였다. 

내가 한국 현대사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오로지 빛나는 승리와 영광의 기록이어서가 아니다. 그런 역사는 어디에도 없다. 개인이든 국가든, 모든 역사에는 명암이 있다. 우리의 현대사도 빛과 어둠이 뒤섞여 있다... 만약 어떤 사회가 추하고 불합리하며 저열한 상태에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더 아름답고 합리적이며 고결한 상태로 변화했다면, 그 과정을 기록한 역사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한민국 현대사 55년이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역사라고 생각한다.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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