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 프로그램 중에 <팬텀싱어> 시리즈를 열광적으로 좋아한다. (세상의 모든 장르를 노래하는 크로스오버 남성 4중창 결성 프로젝트!) 2016년부터 매 시즌을 정주행해왔다.나의 안물안궁 원픽은 시즌3의 고영열이다. 예선 '춘향가'부터 결승전 '흥타령'까지, 그의 노래는 '소리'가 아니고 '소름'이다. 작사가 김이나의 평처럼 바람 소리 많이 들어간 대나무 숲, 혹은 단소 같다. 언젠가 그의 국악 공연에 가는 것은 나의 버킷리스트다.
시즌1 당시 유치원생이었던 내 아이들은 이제 초등 고학년이 되었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접한 첫 어른 음악이 팬텀싱어다. 풍성한 오케스트라와 중창단의 하모니가 주는 듣는 즐거움은 동요나 만화주제가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으리라. 두 아이 모두 시즌2 우승팀 '포레스텔라'를 가장 좋아한다.
팬텀싱어는 아이들에게도 건전하고 유익한 15세 이상 시청가 프로그램이다. 이를테면 성부나 장르 같은 음악 상식을 자연스럽게 배우고, 다양한 외국어(심지어 히브리어까지)도 슬쩍 맛볼 수 있다. 무엇보다 오디션 특유의 살 떨리는 긴장 속에서도 참가자들이 개인이 아닌 팀으로 성장한다는 점이 좋다. 최종 우승 '팀'이 되기 위해 전략적으로 파트너를 구성하는 모습, 오늘의 파트너가 내일의 경쟁자가 되는 현실, 그럼에도 악마의 편집 없이 서로 응원하는 순간들을 보면서 어쩌면 아이들이 어른 세계의 지혜를 배우겠다고 살포시 기대하게 된다.
지난주 드디어 시즌4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그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난무했는데도 아직도 실력자가 이렇게나 많다는 것에 경악하며 귀호강을 시작했다.
몇 년 전 회사 부장님이 아들 때문에 속앓이 하는 걸 본 적 있다. 명문대를 다니던 학생이었는데 몰래 학교를 관둔 후연기 오디션을 보러 다닌다는 것이다. 격변의사춘기조차 무난하게지나간 순둥이가 다 커서느닷없이 배우의 꿈을 선언한 것은 부모에게청천벽력이었다.회식자리에서 한숨을 푹푹 쉬던 부장님이 갑자기 아들 사진을 꺼내 보였다."우리 아들이 좀 잘생기긴 했지? 근데 연예인으로도뜰 거 같아?"
오늘 팬텀싱어에서 나를 울린 윤현선 참가자(이하 윤 배우)도 비슷한 사연이었다. 그는 원래 S전자를 다녔는데 뮤지컬 배우의 꿈을 못 버리고 결국 6년 다닌 회사를 관뒀다. 사실 오디션 프로에서 그리 별난 사연은 아니다. 팬텀싱어 시즌2에서도 대기업 연구원이었던 강형호가 결국 우승까지 차지했고 이번 시즌에도 세무사 김광진이 있다. 하지만 윤 배우의 사연이 유독 마음이 쓰인 건전직 이력뿐만 아니라 쇼비즈니스에서는 꽤 핸디캡인 '키가 작다'는점 때문이기도 하다. 주변에서는 그를노골적으로 말렸다.
"너 만큼 노래할 수 있는 사람 세상에 널렸어"
"너는 키가 작아서 어차피 주인공을 못할 텐데"
"왜 안정적인 직장을 관두고 딴따라를 하려는 거야?"
하지만 결국 그는 꿈을 좇기로 결심했다. 그 꿈은 주인공이나 우승은 아니었던 것 같다. 뮤지컬 세계로 들어온 지 5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무명이지만,단역이라도무대에 서면행복하다고 한다.
우리 집 첫째는 과학자가 되고 싶고 둘째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한다.꼭 그렇게 거창한 직업은 아니라도 안정적인 직업을 얻기를 바라는 게 부모의 마음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주입식 교육도 시키는데 아직까지는 어려서(?) 잘 따르는 편이다. 하지만 언젠가 내 아이들도 커서 부모라는 세계를 깨고 나갈것을 안다. 그때내가 바라던 길과는 한참 벗어난 쪽으로 가려 하면 어떨까? 난 진심으로 응원해 줄 수 있을까? ... 현재로서는 소심하게 yes다. 내가 특별한 꿈이나 열정이 없어서 영혼 없이 밥벌이를 하며 살고 있으니, 아이가 가슴뛰는 일을찾는다면 "너는 행운아구나" 라며 온 마음으로 축복하고 싶다. 남편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TV를 보다 아이들에게 한 마디 했다. "휴, 너희들은 그냥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라. 아빠가 돈 열심히 벌게"... 하긴, 문제는 돈이야.
그런데 내가 미리 우려하는 폭탄선언은 단순히 직업이나 생계의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나의 유교적 가치관을 뒤흔드는 종류일 수도 있겠다. 그때도난"너를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까. (영화 <Call Me by Your Name>의 엘리오의 아버지가 잠시 떠오른다.)
윤 배우가 오늘 부른 노래는 뮤지컬 <킹키부츠>의 'Hold Me in Your Heart'라는 곡이다.극 중에서 드래그 퀸(여장 남자)인 롤라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와 인연을 끊고 살다가 성인이 되어 아버지와 재회하고 부르는 넘버다. 윤 배우는 이 뮤지컬에서 조연이었지만, 오디션 무대에서만은 주인공의 이 곡을 부르고 싶었다고 한다. 아들을 외면한 아버지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달라고 애원하는 가사라서.
나의 육아에서 육체노동이 차지하던 비중은 이제 대부분 감정노동으로 대체되었다. '차라리 기저귀 갈고 이유식 떠먹이지' 한숨 쉬는 순간들이 많다. 아이들이사춘기를 지나성인이 된 후에도 긴장과 염려의 끈은 놓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 팬텀싱어를 보며 나도 꿈이 생겼다. 언젠가 아이들이 자기 자신으로 살겠다고 고백한다면 그들의 선택을 온 마음으로 끌어안는 부모가 되는 것이다.
윤 배우가 빨간 하이힐을 신고 마이크 앞에 섰다.그가 주인공이 된 무대가 내 가슴속 깊이 박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