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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인 Dec 09. 2022

바다를 좋아하는 종족

@ PEI 썬더 코브 비치


달의 힘이 만들어내는 기암괴석


애틀랜틱 캐나다에는 역사 유적지가 많다. 원주민의 땅이 열강의 탐험지가 되고, 식민지가 되고 마침내 건국에 이른...비교적 짧은 역사이기도 하고 나는 외국인이라 사적지에는 큰 감흥을 못느꼈지만, 역시 이곳의 대자연은 인상적이다. 이 지역은 세계 최고의 조수 간만의 차가 만들어내는 기이한 풍경들로 유명한데, 가장 알려진 곳은 펀디 만(Bay of Fundy)이다. 예전에 EBS 다큐프라임 <달의 기적>편에서 본 바에 따르면, 밀물 때는 바닷물이 16m까지 치솟는데 그때의 유량이 무려 1000억 톤이라고 하니 상상이 안간다. 우리는 일정상 펀디 만 대신 PEI의 썬더 코브 비치(Thunder Cove Beach)로 갔다.


이곳의 랜드마크는 찻잔 바위(Teacup Rock)라는 괴석이다. 만조 때는 수위가 너무 높아 바위를 비롯한 주변이 모두 잠기기 때문에 조수 시간표를 미리 확인하고 썰물 때를 맞춰 가야 한다. 붉은 해변을 따라 걷다 보니 앞이 가로막혀 더 이상 육지로는 나아갈 수 없는 곳에 이르렀다. 조금 앞 쪽에 작은 찻잔 모양 바위가 있어 "찾았다!" 하고 카메라를 꺼냈는데, 사진을 찍으면서도 설마 이렇게 작을까 갸우뚱하긴 했다. 주변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들어보니 역시 그건 진짜 찻잔 바위가 아니었다. 진짜배기는 바닷물로 조금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아무래도 겁이 나서 포기하려는데 조카가 좀 더 찾아보자고 해서 다시 용기를 냈다. 다행히 아직 물은 발목까지만 찰랑거렸다. 하지만 바닥이 너무 미끄러웠고 유일하게 의지할 만 한 사암 절벽은 표면을 잡으부스러내릴 것 같아 아슬아슬했다. 게다가 스마트폰이 바다에 빠지면 대낭패라 심장이 쪼그라들거 같았다. 한참을 낑낑거리며 모퉁이를 돌아 마침내 붉은 모래와 푸른 바다의 경계에 홀로 솟은 이 기이한 보물를 찾았다. "이거네! 여기 있었어!"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으로 모두 환호를 질렀다. 이 바위는 고작 한두 시간 후 밀물이 려들면 금세 모습을 감출 것이다. 이 날의 스릴 넘치는 경험은 우리 가족 모두 두고두고 얘기하는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간조 때의 Teacup Rock(위 가운데 : 꼬마 티컵 , 아래 : 진짜 티컵)


바다를 좋아하는 해준과 서래


두 달 후 10월 말, 다운타운 토론토의 TIFF Bell Lighthouse에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봤다. 너무 매혹적인 멜로 영화였다. 극장을 나와 며칠 동안 계속 영화를 곱씹었다. 해준과 서래가 서로 사랑하게 된 이유는 둘이 같은 종족이라서다. '많은 것을 말해주는 꼿꼿한 자세', '현대인답지 않은 품위', '말씀보다 사진을 선호하는 취향' 같은 증거가 세련되게 영화에 등장한다. 형사와 피의자, 유부남과 미망인이라는 둘의 관계얄궂었지만 같은 종족인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얻는 위안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또 해준과 서래는 둘 다 산보다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영화에는 산도 나오고 바다도 나오지만, 결국 엔딩 장면은 (산처럼 보이기도 하는) 바다였다. 해준의 표현을 빌려 '서서히 물드는 잉크 같은' 이 장면이 두고두고 마음을 적신다. 여기 바닥이 완전히 드러났을 때 운명을 결의하는 서래에게, 밀물이 들어차기 직전 울부짖는 해준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영화 OST 중 유명한 정훈희의 안개. 말러의 교향곡 만큼이나 조영욱(& 더 사운드트래킹스)의 엔딩곡에 푹 빠졌다. 스태프들이 전국을 뒤져 찾았다고 하는 동양화풍의 장소는 삼척의 부남해변이라고 하는데, 부산의 시마스시집과 함께 내가 꼭 가볼 곳이다.


Decision to Leave


허리케인이 앗아간 찻잔 바위


영화를 보고 나서 썬더 코브 비치를 떠올린 건 단지 조수차나 비주얼적 유사성 때문만은 아니다. 섬에서 보물찾기를 한지 정확히 한 달 후인 9월 26일 안타까운 지역뉴스가 전해졌다. 허리케인 피오나가 캐나다 동부 해안을 덮쳐 큰 피해가 발생했는데, 찻잔 바위도 그중 하나였다. "PEI의 상징적인 Teacup Rock은 열대성 폭풍 피오나 후 사라졌습니다." 섬에서 가장 많이 사진 찍힌 바위이자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추억을 안겨준 랜드마크가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뉴스를 카톡으로 전달받고 썬더코브비치에 같이 갔던 우리들은 처음엔 어안이 벙벙했지만 곧 한숨을 내쉬며 입을 모았다. 그때 절벽을 돌아 끝내 바위를 찾아보길 잘했다고. 어차피 해안선은 영원히 변하는 것이다. 태양과 달과 지구가 있는 한 바위들은 계속 생기고 사라질 것이다.




이 걸작이 23년 아카데미 영화제에 출품되었다. 북미 흥행이 성공해야 수상 가능성이 높아진대서 며칠 전 노스욕 영화관에서 2차 관람을 했다. 내용을 다 아는 상태로 보니 눈물이 더 많이 났다. 특히 절에 가서 종을 치는 장면이 그렇게 애틋하다. 지금까지 본 한국영화 중 최고다. 

Thunder Cove Be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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