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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인 Dec 21. 2022

이민자의 나라에서 <파친코>를 읽고

내가 마주하는 디아스포라


당신의 지위는 무엇입니까?

What is your status in Canada?


캐나다에서 학교나 은행에 가면 종종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21세기에 맞닥뜨리는 대화치고는 다소 껄끄럽다. 하지만 이곳은 워낙 외국인이 많이 사니까 대부분의 행정처리가 대상자의 신분 확인에서 출발하므로 이해는 된다. 캐나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캐나다에 사는 4명 중 1명이 외국인이다. 내가 사는 토론토는 절반 이상이 이민 1세대 또는 1.5세대라 하니 진정한 이민자의 나라다. 여기서 많은 이주공사, 유학원, 랜딩서비스업체를 직,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이민 비즈니스 시장의 광대함에 입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어쨌든 위 질문에 답하면 나는 시민권자도, 영주권자도 아닌, 신분의 사다리 가장 아래에 있는 임시 거주자다. 이 지위로는 신용카드 발급, 집 렌트, 의료 서비스 수혜 등 실생활에서 많은 제약을 겪는다. 뭘 실수했다가 추방당하지 않을까 하는 근심도 늘 안고 산다.



이민자의 나라


우리 아이들이 다녔던 초등학교의 교실은 이 동네의 인종 구성을 쉽게 보여주는 미니 캐나다이다. 학생들은 한국, 중국, 일본, 인도, 콜롬비아, 네덜란드, 그리고 토종 캐나다인(이민 2세대 이상) 등 다양한 배경을 지니고 있어 캐나다의 공립학교가 아닌 싱가포르의 국제학교에 등록한 기분이었다. 연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러시아계, 우크라이나계 학생이 있는 교실에서는 왜 이런 전쟁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토론도 있었고, 얼마 전 이란 히잡 시위가 전세계로 번졌을 때는 토론토 영스트리트의 시위에 참가한 반친구 부모의 얘기도 들었다. 마치 아이들의 교실에서 '세계는 지금' 뉴스가 중계되는 모양새였다.


이 동네를 선택한 데는 (영어도 어설프고 덩치도 작고 백인이 아닌) 우리 애들이 학교에서 위축되지 않기를바라는 마음이 컸었다. 역시 똑같이 자식을 위하는 마음으로 반대의 기준을 택하는 용감한 부모들도 많다. 백인 중산층 지역이나 아예 토론토보다 이민자가 적은 시골 지역으로 가는 경우다. 또는 이런 고민 없이 유학원이 제안한 곳으로 무턱대고 왔다가 예상과 다른 동네 분위기 겪고 당혹스러워하는 경우도 종종 봤다(백인도 없고 여기 캐나다 맞아?).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어차피 원주민의 땅


이러나저러나 여기 토종 캐나다인 행세를 하는 백인들도 사실 원주민은 아니다. 캐나다의 공식 행사는 어김없이 '원주민 토지 인정 선언(Land Acknowledgement)'으로 시작된다. 야구장에서 진행자가, 대학에서 교수가, 천문대에서 과학자가, 콘서트에서 지휘자가 본 일정을 전에 손을 들며 선언하는데, 구구절절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 땅은 원래 원주민의 땅이며 우리(이주민들)가 여기 살게 허락해주어 고맙다"는 것이다.


국기에 대해 경례보다 이걸 더 강조하는 이유는 백인들이 원주민을 박해했던 어두운 과거사에 기인한다. 작년 캠룹스의 한 원주민 기숙학교 부지에서 어린이 215구의 유해가 묻힌 대규모 무덤이 발견되어 캐나다 전역에 큰 충격을 안안겼다.과거 캐나다 정부는 강제로 원주민들을 백인 문화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폈다고 한다. 특히 어린이들은 기숙학교에 감금된 채 그들의 가족, 종교, 언어와 분리되고 학대를 당했다. 특별히 임팩트 있는 역사가 없는(?!) 캐나다에서 이 일은 굉장히 뼈아파서, 국가 차원에서 끊임 없는 반성과 화해의 노력을 하는 것 같다. 얼마 전 9월 30일은 '진실과 화해의 날(National Day for Truth and Reconciliation)'이었다. 'Orange Shirt Day'라고도 불리는 이 날은 아이들이 오렌지색 셔츠를 입고 학교에 가서 "Every Child Matters"의 말뜻을 배웠다.

토론토 시 홈페이지의 토지 인정 선언 + 원주민 어린이 희생자를 기리는 오렌지 리본


소설 파친코


주민들이 원주민들을 침략한 땅에서, 원주민들이 이주민을 박해하는 이야기인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를 읽었다. 올해 초 동명의 드라마가 굉장히 화제가 되었는데 운 좋게 동네 도서관에서 한국어 번역본을 찾아냈다.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등장인물들과 빠른 속도의 이야기가 시종일관 흥미진진했다.


이 소설에 나오는 한국인들은 모두 똑똑하고 근면하다. 부모와 선자 세대는 물론이고, 노아와 모자수, 가장 어린 솔로몬까지 모두 일본에서 핍박 받았지만 타고난 총명함과 성실함으로 타국에서 살아남는다. 소설에서 가장 가슴 아픈 캐릭터는 '노아'였다. 와세다대학에 입학할 만큼 영특하고 사업가로서도 성공하지만 속으로는 늘 일본인이기를 꿈꾼 아이. 결국 자이니치로서의 정체성에 극심한 회의를 느끼고 비극을 맞이한다.


한국의 위상이 전례 없이 높아진 요즘도 소위 '바나나 워너비'들이 있다고 한다. 아시안계 커뮤니티를 거부하고 백인들과 주로 어울리는 동양인들을 비하하는 말이다. 나도 종종 "여긴 왜 검은 머리 밖에 없냐" 며 혀를 끌끌 차는 검은 머리를 만났다. 하지만 마냥 인종주의라고 보기만은 어려운 것이 캐나다에서 본인의 능력으로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가만히 보면 아시안 상대의 비즈니스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사람 사는 동네가 다 그렇듯 인맥의 힘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어진 시장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결국은 백인 주류사회에 진입해야 할 것이다. 토론토 어느 지역의 한국계 시의원은 아시안계 유권자를 기반으로 당선되었지만 정치 생명을 위해 백인과 결혼했다는 얘기도 들었다(팩트체크된 건 아님). 결과적으로 아시안들이 장관도 되고, 대학교수도 되면서 백인들이 차지하던 책상에 이름표를 놔야 다른 다른 아시안들의 운신의 폭도 넓어질텐데 굳이 눈을 흘길 일은 아닌 것 같다.

파친코


21세기의 디아스포라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건너간 조선인들의 가혹한 경험과는 비교할 바가 못되겠으나, 이 책을 읽으며 21세기에 캐나다로 이주하는 한국인들의 디아스포라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들은 왜 이주를 꿈꿀까. 오프라인 인맥은 뻔한 대신 5개나 되는 캐나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늘 눈팅을 하는 덕에 나는 그 이유를 알만큼 안다고 자부한다. 그중 공감하는 하나는 '경쟁으로부터의 탈출'이다. 반세기 만에 최빈국에서 G7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으로 국격이 수직 상승하는 동안 혈투는 필연적이었을까. 세계 최강의 노동강도, 교복을 입기도 전에 대입을 준비하는 입시문화. 성공하기 위해서는 공부도 잘해야 하고 외모도 잘나야 하고 조부모 재력까지 뒷받침되어야 하는 한국 사회는 때로는 서슬 퍼런 도마 같다. 나도 내 아이가 겪을 지독한 무한경쟁이 두려워 영주권 레이스를 종종 고민했다. 


하지만 두 나라를 저울질해봐도 결국 내 살 곳은 한국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남의 나라에서 밑바닥부터 새로 시작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무난하게 대학 가고, 취업하고, 가끔 승진도 해가며 나도 꽤 쓸만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살아왔지만, 타국에 나와보니 내 힘만으로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음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틈날 때 미용이나 재봉 기술이라도 배워뒀으면 이민을 더 진지하게 고민해봤을지도. 

성공 세금은 시기 때문에 생겨나는 거고, 실패 세금은 착취 때문에 생긴 거군요. 솔로몬이 이해하기 시작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반 세금은 뭐죠? 일반 세금은 너처럼 자신이 보통 사람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이 내는 거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거운 세금이지. (파친코 2권 중)
토론토 한인회에서 연 한인축제


코리안 코스모폴리탄


한편 캐나다 시민권을 받을 수 있는 한국인들도 굳이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영주권만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캐나다에서 20년을 산 P도 여전히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 여권 파워가 세계 2위야. 캐나다는 7위인데. 내가 캐내디언 남편이랑 외국 나가면 나는 그냥 통과인데 남편은 출국인터뷰도 한참 한다고", "캐나다는 누가 총리가 되어도 최악으로 갈 일은 없어. 근데 한국은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망할수도 있는 나라잖아. 내가 한국 투표권을 포기 못하는 이유지" P는 5년마다 영주권을 갱신하는 번거로움도 재외국민 투표에 참여하기 위한 장시간 운전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그럼 왜 한국이 아닌 캐나다에 사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래서 서울대 김성곤 명예교수의 파친코 소설 작품해설이 인상적으로 와닿았다. 이제는 강제이주나 민족 이산을 뜻하는 디아스포라의 시대가 아니라,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는 "트랜스내셔널리즘의 시대"라는 것이다. 한 나라에만 의리를 지킬 필요가 없고 두 나라에 모두 충성해도 된다는 뜻이다. 내가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에 정착했지만, 대구가 종종 싫고, 서울이 더 좋지만 결국은 대구와 서울 둘 다 좋은 것처럼. 이제 코스모폴리탄으로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낯설고 적대적인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만들어가는 꿋꿋하고 용기있는 사람들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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