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중고거래, 어디까지 해볼까?
미국에서 1년 살기
코스트코에서 사 온 매트리스박스는 한동안 우리의 식탁이자 책상이었다.
마룻바닥에 비닐을 깔고 밥을 먹거나 바닥에 엎드려 숙제하는 것처럼 바닥에 앉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허리를 숙이지 않고 밥을 먹거나 글씨를 쓸 수 있다는 건 꽤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당장의 불편함이 어느 정도 사라지자 빨리 가구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희미해졌다.
'1년 동안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없이 살아볼까?' 하는 무모한 생각도 잠깐 들었다.
하지만 앉기에는 약간 높고 무릎을 세워 앉기엔 다리가 아픈 어중간한 높이에 다시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인간은 불편함을 느껴야 행동한다고 했던가?
그래서 문명이 발전하고 새로운 발명품이 나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던데, 우리 역시 그랬다.
슬슬 박스책상이 불편해지고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고나니 하루라도 빨리 테이블을 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이케아에 다녀오는 게 제일 간단했지만 조금이라도 돈을 절약해 보고자 일단 중고시장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가장 많은 중고물품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곳은 역시 한인 커뮤니티였다.
우선 말이 통하고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물건이라 우리가 찾는 아이템들을 거의 다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괜찮은 물건들은 올라오자마자 바로 팔리기 때문에 맘에 드는 테이블들은 이미 거래가 완료되어 있었다.
혹시 미시 usa에 이 지역 커뮤니티가 있는지 찾아보다가 미국 현지인들이 사용하는 동네 앱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일종의 지역주민 인터넷카페처럼 거주자들을 통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Nextdoor라는 이 앱에는 동네마트 세일 같은 그 지역의 여러 소식부터 아르바이트 정보, 창고세일, 중고물품거래 등 회원들 간의 활발한 거래가 이뤄지고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건 고학년 아이들에게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소정의 금액을 주고 짐을 옮기거나 베이비시터, 라이딩을 의뢰하는 경우가 꽤 많았다.
일찌감치 자기의 용돈을 스스로 버는 걸 장려하는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중고물품거래에 올려둔 물건들을 보면 사람들이 자기 물건에 얼마나 애착이 강한지 알 수 있었다.
엔틱이라고 우기면 어쩔 수 없지만 내 눈에는 진짜 낡고 더러운 가구들도 제법 비싼 가격에 올려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나라에선 저 정도면 그냥 가져가라고 해도 절대 안 가져갈 것 같은데...
심지어 배출할 때 신고하고 돈을 내야 수거해갈 것 같은 물건들인데도 중고거래를 위해 올라와 있었다.
괜찮은 테이블이 없을까 스크롤을 올리던 중 저렴하게 올라와있는 괜찮아 보이는 프린터를 발견했다.
마침 프린터도 하나 사려던 참이라 채팅창으로 말을 걸었다.
답변은 금방 왔고 지금 바로 가지러 갈 수 있다고 하니 집 주소를 알려주며 내 이름을 물어봤다.
자기는 지금 집에 없고 남편이 프린터를 건네줄 건데, 들어올 때 가드에게 이름을 말하면 들어올 수 있도록 얘기해 두겠다고 했다.
경비원이 있는 아파트인가?
알려준 주소를 네비에 찍고 남편과 함께 출발했는데, 위치상으로는 가까워 보였는데 굽이굽이 숲길을 계속 지나가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네비가 알려주는 대로 가다 보니 도착지는 차량 통제를 위한 출입문이 있는 타운하우스 입구였다.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리니 제복을 입은 가드가 다가와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다.
나 몇 호에 가는 누군데 재클린하고 미리 약속했다고 했더니 "아~당신 오기로 한 거 연락받았다."라고 하며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이거 약도인데 이대로 찾아가면 돼. 그리고 주차할 때 앞유리에 올려둬"
'웬 약도?'
가드가 건네준 종이에는 내 이름과 방문시간, 그리고 주소와 그 집을 찾아가는 방법이 적혀있었다.
직진하다가 호수옆에서 좌회전, 몇 미터 직진하다가 삼거리에서 우회전, 그리고 몇 번째 왼쪽집, 뭐 이런 식이었다.
한참을 가다 보니 왜 약도를 줬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단지 입구부터 시작된 골프장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어서 한참을 가도 같은 풍경이 반복되는 것 같았다.
드넓은 호수를 끼고 넓게 펼쳐진 골프장을 지나니 띄엄띄엄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지 안을 빙빙 돌다 보니 이젠 어느 쪽이 북쪽인지 헷갈리면서 점점 약도에 의지해서 집을 찾아갔다.
'호수를 끼고 삼거리에서 좌회전... 이게 그 삼거리인가?'
가도 가도 골프장만 보이는 게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들고 이러다 길을 잃는 건 아닌지 불안해질 무렵 집들이 나란히 붙어있는 곳에 도착했다.
알려준 주소는 엄청 큰 싱글하우스였다.
미국 집들이 워낙 큼직큼직하지만 여기 있는 집들은 차원이 달라 보였다.
'내가 맞게 찾아온 건가?'
떨리는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다리에 깁스를 한 남자가 문을 열어주며 들어오라고 했다.
현관 옆에 붙어있는 서재에는 프린터기가 올려져 있었는데, 남자는 코드를 꽂아서 제대로 작동되는 걸 확인시켜 주겠다고 했다.
프린터에 전원이 켜지고 출력이 되길 기다리는 내내 적막이 흘렀다.
뭔가 스몰토크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다리는 어쩌다가 다쳤냐고 물었더니 뭐라 뭐라 한참을 다다다다 얘기하는데, 내가 알아들은 건 두 달 동안 깁스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안쓰럽게 "Oh......"라는 단 한 마디로 유감을 표시했다.
스몰토크로 분위기가 좀 부드러워져서인지 아니면 내가 불쌍해 보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남자는 혹시 카트리지 새 거가 있는데 필요하냐고 물었다.
공짜로 준다는 얘긴지 아님 그것도 살 거냐고 묻는 건지 이해를 못 해서 그저 말없이 25불을 내밀었다.
그랬더니 프린터 위에 카트리지를 올리고는 자기 다리가 이래서 도와줄 수 없는데 혼자 들고 갈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남편이 차에 있어서 괜찮다고, 고맙다고 말한 후 인사하며 집을 나왔다.
카트리지 가격만 해도 10불 정도 될 것 같은데, 25불을 위해 귀찮음을 무릅쓰고 프린터를 중고사이트에 올리다니.
어쨌든 우리는 덕분에 득템도 하고 멋진 집들도 구경할 수 있었으니 그 절약정신에 박수를 보낸다.
이렇게 프린터도 갖추고나니 테이블이 더욱 간절해졌다.
문득 공항픽업을 해주셨던 이삿짐업체 사장님이 생각나서 혹시 중고로 식탁을 구할 만한 곳이 없는지 연락드려보았다.
마침 처분하려던 이케아 식탁이 있는데 의자가 두 개밖에 없어서 우리 가족에게는 부족할 것 같다고 하셨다.
우린 당장 가지러 가겠다고 말씀드리고 30불에 식탁과 의자 두 개를 구입할 수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의자 두 개를 아마존에서 추가로 주문했다.
이제야 비로소 정상적인 자세로 식사와 숙제가 가능해졌다.
이후에 중고시장에서 살림을 정리하는 유학생 부부를 통해 이케아 책상과 2인용 소파, 1인체어도 구입하고 나니 제법 구색이 맞춰졌다.
비록 서로 색도 안 어울리는 낡고 많이 부족한 가구들이었지만 불편함이 조금씩 해소되는 그 느낌은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성취감이었다.
과하지 않게 조금씩 편리해지는 앞으로의 생활이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