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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락 Dec 12. 2023

우리 아파트 맥가이버 아저씨

미국에서 1년 살기

욕실 천장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길래 오피스에 얘기했더니 맥가이버 아저씨가 왔다.

한 달 사이에 이 아저씨를 벌써 서너 번은 본 듯하다.

무슨 새집에 입주한 것도 아닌데, 하자보수가 이렇게 많은지...

부엌등 전구가 나가서 부르고, 모기장같이 생긴 전기레인지가 고장 나서 부르고, 이번엔 욕실 천장까지 말썽이다.

뭐든 뚝딱뚝딱 고쳐주는 건 좋은데 항상 워커를 신은 채로 저벅저벅 거침없이 들어와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때문에 아저씨가 왔다간 후엔 온 바닥을 쓸고 닦아야 했다.

전등을 갈아주러 처음 우리 집에 방문한 날, 아저씨는 집에 들어오기 전에 신발을 벗어야 하냐고 물었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끈 달린 워커를 신고 있어서 차마 벗어달라는 말을 못 했는데, 그 후론 묻지도 않고 신발을 신은 채로 그냥 들어와 버렸다.

다행히 우리 집 거실은 카펫이 아닌 나무바닥이라 걸레질만 잘하면 되었고, 신발을 신고 들어오나 벗고 들어오나 어차피 아저씨가 가고 난 후엔 바닥을 닦을 것 같아서 그대로 뒀다.


또 한 가지 적응이 안 되는 건 언제 방문할지 모른다는 거다.

전구를 갈아달라고 오피스에 얘기했을 때는 바로 한두 시간 정도 후에 와서 전구를 갈아주고 갔다.

미국답지 않은 신속한 처리에 꽤나 놀랐었는데, 전기레인지를 고쳐달라고 했을 때는 한 이틀정도 후에 말도 없이 방문했다.

나는 샤워 중이었고 다행히 남편이 집에 있을 때라 문을 열어주고 전기레인지를 고쳤는데, 아저씨가 수리를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 나는 욕실 안에서 꼼짝도 못 하고 기다려야 했다.

띵동 몇 번 하다가 문을 쾅쾅 두드리다가 그래도 대꾸가 없으면 비상키로 문을 따고 들어오기 때문에, 만약 남편이 집에 없었다면 매우 곤란한 상황이 됐을 거다.

한국 같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인데, 집주인이 없는데도 막 비상키로 문을 열고 들어와서 수리를 하다니.

그동안 도난사고나 민망한 상황이 한 번도 없었던 건지, 아니면 이 아파트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네가 고쳐달라고 신청했으니 난 고치러 왔다.'는 단호함과 막무가내가 느껴졌다.

집에 귀중품이 없어서 뭐 없어질 걱정은 없지만 혹시 모르니 혼자 있을 때 샤워는 못할 것 같았다.


맥가이버 아저씨는 화장실 천장을 살펴보더니 잠깐 윗집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윗집은 낮시간엔 항상 비어있는 것 같았는데, 2층으로 올라간 아저씨가 초인종을 누르더니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워커를 신은 채 거실을 가로지르는 아저씨의 발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비상키로 열고 들어간 모양이었다.

이 아파트는 목조로 지어진 아파트라 층간소음이 꽤 심했다.

콘크리트와 달리 목조바닥은 소리가 많이 울리기 때문에 평일 낮엔 비어있어서 조용한 윗집이 퇴근 후에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발소리가 들렸다.

우리도 저녁 먹고 왔다 갔다 하는 저녁시간엔 별로 못 느끼는데, 일찍 자려고 누우면 저녁 늦게 세탁기를 돌리는 윗집의 생활소음이 간혹 들렸다. 

워커를 신어서 그런지 아저씨의 발소리는 유난히 더 잘 들렸다.

평소에 윗집 사람들이 얼마나 조용했던 건지 새삼 고마울 정도였다.

발소리만으로도 아저씨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한동안 화장실에서 뚝딱뚝딱거리더니 다시 거실을 가로지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마 우리 집으로 다시 내려오는 거겠지.

예상대로 우리 집으로 온 아저씨는 윗집에 올라가서 변기를 뜯고 실리콘을 다시 쏘고 수전도 갈았으니 이제 괜찮을 거라며 며칠 후에 자기가 다시 와서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겠다고 했다.

며칠 후인지 정확히 알 수 없냐고 물어봤더니 자기가 이 아파트 안의 모든 수리를 하기 때문에 자기도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언제 다시 올 지 모르니 어쩔 수 없이 당분간 혼자 있을 때 샤워는 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틀 후 아저씨가 다시 방문할 때까지도 물방울은 계속 떨어졌다.

결국 아저씨는 터프한 톱질로 우리 집 욕실 천장에 커다란 구멍을 뻥 뚫었다.

윗집에서 물이 새는 것은 막았지만 그동안 새어 나온 물들이 위층과 우리 집 사이의 공간을 채운 단열재에 모두 흡수되어서 그 물이 계속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물에 흠뻑 젖어 있는 걸 그냥 두면 혹시 곰팡이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바짝 말려야 한다며 엄청나게 큰 제습기와 강풍기를 들고 왔다.



얼마동안 틀어놔야 하냐고 하니 '마를 때까지'라는 아주 애매모호한 답변뿐이었다.

자기도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가끔 와서 살펴볼 테니 절대 끄지 말라고 했다.

제습기와 강풍기 두대가 윙윙 돌아가는 소리는 꽤나 컸다.

우리 침실 쪽이 아니라 잘 땐 괜찮았지만, 낮에 왔다 갔다 하며 생활할 때는 화장실 문을 닫아두어도 웅웅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마치 백색소음처럼 계속 들렸다.

마침 주말에 여행계획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에도 내내 이 소리를 듣고 있었다면 심란해서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우리도 우리지만 윗집도 덩달아 이 백색소음 감옥에 갇혀버렸을 텐데 시끄러워서 어떻게 할는지. 



저 두꺼운 솜이 뽀송뽀송하게 말라야 한다는데, 하루동일 돌아가는 거대한 제습기와 강풍기를 보고 있으니 슬슬 전기값이 걱정되었다.

이건 하자보수니까 전기세를 우리가 내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

그럼 다음 달 관리비에서 좀 빼주려나?

절대 가정용이라고 볼 수 없는 공사장에서나 쓸 법한 이 커다란 덩치의 기계들을 몇 날 며칠을 틀어놓아도 괜찮을까?

혹시 과열돼서 폭발하는 건 아닐까?

윙윙대는 백색소음이 전기세 폭탄을 예고하는 것 같아 더욱 불안했다.

결국 일주일 내내 가열차게 작동시킨 제습기 덕분에 단열재는 원상복구가 되었고 그렇게 욕실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리징오피스에 가서 이런 상황을 설명하며 혹시 전기값이 많이 나오면 좀 빼줄 수 있냐고 했더니 황당한 얼굴로 전기값이 그걸로 그렇게 차이 나지 않을 거라며 걱정 말라고 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영어로 더 이상 따지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던 우리는 다음 달 관리비가 나올 때까지 내내 불안에 떨다가 고지서를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미국은 정말 전기세가 저렴한 것 같았다.

첫 달에 액땜한 셈 치고, 앞으로는 맥가이버아저씨를 가급적 볼 일이 없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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