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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락 Dec 15. 2023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1년 살기

미국에 온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지나고 났으니 '벌써'라고 여유를 부려보지만, 하루하루가 굉장히 바빴던 한 달이었다.

그동안 간간히 중고물품들을 구매해서 이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웬만큼 다 갖춰진 것 같다.

중고거래 덕분에 드라이브 아닌 드라이브를 실컷 하다 보니 집 근처나 조금 멀리 떨어진 지역들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정말 여러 형태의 집들과 동네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비록 중고지만 나는 처음 쓰는 것들이니까 왠지 새살림을 장만하는 듯한 재미도 있었고, 이제야 집에서 안정감이 느껴졌다.


아파트 1층인 우리 집은 북서향이었다.

남쪽으로는 창이 전혀 없고 모든 방과 거실의 창이 북쪽으로 나 있는 집은 한국에서 무더위를 보내다 온 우리에게 천국이었다.

캐리의 기후 자체가 제주도 정도의 기온이라 좀 더 시원하게 느껴진 것도 있지만, 확실히 북쪽 창은 햇볕이 한번 걸러져서 들어오는 듯한 느낌으로 집안의 온도가 많이 올라가지 않았다.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그렇게 덥지 않고 마룻바닥은 오히려 시원할 정도여서 다가올 겨울이 살짝 걱정되기 시작했다.

여름에 이렇게 시원하면 겨울엔 완전 얼음창고가 되는 거 아닐까?


북쪽으로 난 창가 앞에는 도로와 아파트를 분리하는 공동 화단이 있었다.

우리 동의 모든 집들은 북향 아니면 남향이었는데, 북향인 집들은 잔디뷰이고 남향인 집들은 주차장뷰였기 때문에 다시 선택을 한데도 북향집을 선택했을 것 같다.

남향인 집들은 아무래도 사람들이 계속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하루종일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고, 주차장의 소음이 꽤나 거슬릴 것 같았다.

그래서 뷰만큼은 싱글하우스 부럽지 않은 조용하고 시원한 우리 집이 참 좋았다.



처음엔 필요한 것들도 많고 삼시 세끼를 집에서 해 먹다 보니 이틀에 한 번꼴로 마트에 다녀왔다.

그러다 보니 냉장고는 어느새 식재료와 간식들로 꽉 차게 되었다.

한국에서 냉장고를 비우기 위해 근 한 달을 '냉장고 파먹기'를 하다 왔는데, 비우는 건 어려워도 채우는 데는 3일이면 충분했다.

아이들은 마트마다 진열돼 있는 처음 보는 음료들과 간식들에 열광했고 남편과 나는 수많은 맥주와 와인에 흥분했다.

가능한 다 먹어보고 가겠다는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마트에 갈 때마다 카트를 가득 채웠다.

한식 위주의 식단들에도 점점 새로운 식재료를 이용한 요리들이 더해졌고, 다양한 향신료들을 너무나 쉽게 구하고 맛볼 수 있는 식도락에 점점 빠져들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김장김치가 한 달 만에 동이 났다.

얼마 남지 않은 너무나 소중한 김치로 김치찌개까지 끓이기엔 너무 아까워서 꾹 참다가, 남은 김치국물에 알배추와 돼지고기를 넣고 푹 끓이니 얼추 김치찌개 같은 맛이 낫다.

한인마트에는 배추김치 외에도 총각김치, 맛김치 등 다양한 김치들을 팔고 있었지만 김치소비량이 어마어마했던 우리의 식단을 감당하기엔 김치값이 너무 비쌌다.

두 세 통 정도 사 먹어 본 후 이 정도 양으로는 택도 없다는 걸 깨닫고는 할 수 없이 가장 간단한 깍두기를 시작으로 김치를 담그기 시작했다.



MS언니가 빌려준 전기밥솥 덕분에 나는 드디어 냄비밥의 늪에서 벗어났다.

갓 지은 냄비밥이 더 맛있다는 의견들도 있었지만 가볍게 묵살하고 편리함을 선택했다.

아무리 미니멀라이프라고 해도 누릴 건 누려야 했다.



캡슐커피 머신도 생겨서 커피뿐만 아니라 코코아나 티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바로 내린 원두커피의 맛에 비할바는 아니었지만 인스턴트 봉지커피로 버티던 우리에게 이보다 더 훌륭할 순 없었고, 수많은 종류의 캡슐들을 먹어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가 되었다.



영어를 쓸 일이 거의 없는 체육시간이 가장 재밌다는 첫째 아이는 내가 알던 그 집돌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활동량이 늘어났다.

방과 후엔 매일같이 클라이밍이나 농구를 하러 체육관에 가고 싶어 했고, 이제 그만 집에 가자고 해야 아쉬움을 잔뜩 남긴 채 집으로 돌아왔다.

"한국도 좋고 미국도 좋아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왠지 조금 더 용기가 나요."

그동안 의연하게 지냈지만 알게 모르게 속에 담아둔 상처들이 있었나 보다.

축구나 달리기를 잘하지 못해서 잔뜩 위축되었던 아이가 지금은 체육시간이 제일 재밌다고 말하는 게 의아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자기가 공을 차기만 하면 그게 슛이던 패스던 잘못 차던, 아이들이 눈만 마주치면 항상 엄지척해줘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즐겁게 잘 지내는 걸 보니 왠지 더 마음이 짠했다.

부디 아이의 1년이 눈치 덜 보며 하고 싶은걸 마음껏 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라본다.



둘째 아이는 피아노연습을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연습은커녕 거들떠도 안 보더니, 집에 놀러 오는 친구도 없고 할 일도 별로 없는 심심한 상황이 되니 피아노라도 뚱땅거리고 싶어 진 것 같았다.

중고시장에서 단돈 10불에 산 야마하 전자키보드는 건반이 61개밖에 안되고 새털같이 가벼운 터치감이었지만, 피아노와 달리 여러 악기소리가 나는 게 재밌는지 수시로 앞에 앉아서 띵똥거렸다.

매일 연습해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 장난감이 하나 더 생긴 기분으로 피아노 앞에 앉은 아이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악보에 집중했다.



영어는 한 마디도 못 했던 아이가 스스로 숙제를 챙기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재잘재잘 이야기 해주기 시작했다.

"엄마, 제이콥은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엄지척해주면서 Good job이래. 웃기지?"

아이의 뿌듯한 얼굴을 보니 나의 마음도 덩달아 뿌듯해졌다.

첫째아이나 둘째 아이나 반 친구들이 다들 엄~청 착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날씨가 조금씩 서늘해지고 올해에 수영장을 이용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체육관에 가지 않는 날이나 주말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오전부터 수영장에 가서 여유롭게 놀다 왔다.

한 달 만에 아이들은 튜브 없이 노는데 익숙해졌고 자유형이나 배영 같은 수영이 아닌 잠수나 개헤엄 같은 물놀이를 즐겼다.

'해야 하는 것'이나 '해도 되는 것'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면서  '할 수 있는 것'이 늘어났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면 그냥 하면 된다는 용기도 생겼고, 해도 되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정신없는 한 달을 보낸 후에야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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