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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Aug 25. 2016

송림동의 크리스마스 10

어린아이의 걸음으로 한참을 걸어, 검은 매연을 뿜으며 달리는 낡은 트럭들을 피해서, 잡풀이 듬성하게 숲을 이루는 인도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콘크리트 보도를 걷다가 익숙한 공장의 쇳소리가 귀에서 잦아들 때쯤이면 고약한 악취가 흐르는 방치된 농수로가 나타난다. 그 옆으로 좁은 흙길이 나있고 그것이 길의 끝이었다. 굵은 철조망이 길의 끝에 명백한 출입거부 의사를 밝히며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허나 매양 놀거리를 찾기에 하루가 모자랐던 송림동의 아이들에게 그런 것은 장벽이 될 수 없었다. 

비릿한 갯내음과 나무껍질이 태양 아래 말라가는 텁텁한 냄새가 바닷바람을 타고 넘어 오는 그 곳으로 철조망의 작은 틈새를 벌리고 비틀어 기어코 들어가는 아이들이었다. 그 너머에 기다리는 것이 사실 대단한 무언가도 아니었는데.     


그저 거대한 통나무들의 산이었다. 하나하나가 어른의 키보다도 큰 둥근 통나무를 겹겹이 쌓아올린 피라미드가 넓은 대지 위에 무던히 펼쳐져있었다. 어지간한 건물보다도 높은 그 통나무의 산을 아이들은 개미새끼처럼 달라붙어 올라갔다. 미처 손질하지 못한 울퉁불퉁한 나무껍질을 딛고 사지를 부지런히 움직여 마침내 그 정상을 정복하면 알 수 없는 뿌듯함이 정수리까지 차오르곤 했다.      


그러면 주변의 어느 것보다도 높은 위치에 내 머리가 서게 되고, 나는 누구보다도 멀리 볼 수 있게 된다. 사위가 고요해지고 어린 볼을 때리는 소금기 묻은 바람 냄새가 옷자락을 낚아챈다. 낡은 바짓단을 잡아채는 꺼칠꺼칠한 나무표면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면, 젖은 흑요석처럼 매끈매끈하게 반짝이는 검은 개펄과 점점이 돌아다니는 흰 갈매기들이 보였다.      


바닷물이 들어찬 곳에도 빼곡히 통나무들이 누워있었다. 그 무거운 몸을 소금물이 띄우고 다닥다닥 붙어서 거대한 뗏목처럼 조심스럽게 일렁이는 그 곳도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출렁거리는 발밑의 감각이 기뻤던 것일까. 아이들은 깡충거리며 띄워놓은 통나무 위를 건너 다녔다.      

펼쳐놓은 대지 위에 태양은 아무것도 가릴 것 없이 적나라한 일상을 비추어 주었고, 노골적으로 솔직한 냄새들은 눈을 감고도 내가 선 곳이 어디인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 매 순간마다 상기시켜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불행이, 나를 삼켜버릴 무심한 검은 악의가 주변에 도사리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일상은 감각을 무뎌지게 하고, 따뜻하게 데워진 나무의 온기와 향은 나를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다.      


어느 저녁, 동네는 부산했고 처절한 울음이 저녁 공기를 찢어놓았다.

무기력한, 습관적으로 틀에 박힌 슬픔이 아니었다. 예리하게 벼려진 갑작스런 불행이 송림동 주민들의 굳은살을 단숨에 베고 들어와 미처 손 쓸 도리 없이 붉은 고통을 쏟아내게 만들었다.     

어린 소년의 시체가 부모의 손에 거둬지고 여인의 울부짖음은 짐승의 것처럼 뜻을 알 수 없는 언어로 길고도 괴롭게 이어졌다.     


소년은 언제나처럼 통나무를 건조하는 바닷가 건조장으로 놀러갔다.

그리고 바닷물 위에 늘어선 통나무를 밟으며 순수한 유희의 기쁨을 만끽했을 것이다. 그때 돌연 예상치 못하게 어깨를 맞대고 있던 통나무 사이가 벌어지면서 검은 바닷물이 드러났다. 소년 작은 몸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통나무 사이가 다시 파도에 의해 붙어버리면서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고 시치미를 떼며 다시 조용히 거대한 집합체가 되어 출렁거린다.

그 사이 바다에 빠진 소년은 머리 위로 굳게 닫힌 완벽한 절망을 두드리며 발버둥 치다 숨을 거두었다.     

그것은 한 번의 목격이었으나, 후일 머리가 크고 나서 알아본 바로는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저러한 이유로 그 목재 건조장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이의 불행이었다. 우리 집안의 누구도 저 비극적인 사건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그 소년의 얼굴조차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 저녁,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여인의 울부짖음 속에서, 세상의 모든 절망, 고통, 슬픔이 들끓는 도가니와 같았던 그 날 저녁을 기점으로 내 보잘것없는 지금의 나날이 아주 많이 바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몇 번이고 꿈을 꾸었다.

어두운 바다와 넘실거리는 통나무들, 그리고 멀리 저 멀리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통나무 사이에서 검은 혀를 날름거리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음험한 구멍. 그 무심한 악의. 

이제 친구도 무엇도 없는 나를 더욱 밑바닥으로 끌고 내려갈 그것이 두려워 몸을 돌려 달아나고 싶은 간절함과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의 순간이 오는 것을 몸서리치며 끝없이 기다리느니 그 구멍으로 당장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 두 가지 상반된 감정 속에서 잠이 든 내내 시달리다 식은땀에 몸을 적시고 소스라쳐 눈을 뜨곤 했다.  긴 밤을 나는 괴로워했고......    


그래, 그렇게 불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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