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암석만큼, 날 것에 가까운

스톤 매트리스-마거릿 애트우드

by 못속









『시녀이야기』 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신작 단편집 『스톤 매트리스』 의 서평을 황금가지 출판사의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 되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글은 건조한 편이다. 바삭하게 마른 낙엽같은 문체를 느낄 수 있다.

나는 건조한 문체가 취향에 잘 맞는 편이다.

내 글이 덕지덕지 뭐가 많이 묻어서 그런지 건조하게 표현을 쭉 잘 뽑아내는 작가들에게

동경심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할까? 나는 천성이 나불대는 편이라 그건 좀 힘들지만.. 허허

신작 역시도 너무 취향에 맞게 잘 읽혔다. 읽는 사람에 따라 약간의 호러적인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듯 하고..여름밤에 참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암석만큼 날 것에 가까운 이야기




『시녀이야기』 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때때로 마거릿 애트우드는 냉소적인 문체로 글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찬찬히 글을 읽다보면 차가운 태도는 작가 본인이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그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주인공이 가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냉소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으며 다소 소극적이기도, 그에 그치지 않고 예민하며 까칠하기도 한 주인공들이 작가의 손짓에 의해 약간은 미지근해진 온도로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온도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지만 체온을 앗아가지도 혀를 화상 입히게 하지도 않는다.


그 오묘한 온도의 이야기들은 이상하게도 뜨겁고 차가운 극명한 온도를 가진 이야기들보다도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피부에 이야기의 질감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특히 표제작인 스톤 매트리스는 스트로마톨라이트(스톤 매트리스, 청록색 조류가 층층이 쌓여 둔덕이나 돔 모양을 형성한 화석화된 쿠션) 의 차갑고 울퉁불퉁한 질감이 만져지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에 책을 읽었기에 울창한 북극의 숲의 공기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고. 묘사에 너무 공을 들이지 않아도 현장감을 이리도 잘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재능의 산물로 느껴진다. (나의 경우를 들어보자면, 휘황찬란한 미사여구 없이는 글을 장식할 수 없는 안타까운 글짓기 실력을 가지고 있다..)


이 단편집의 수록된 이야기의 대부분은 노인들이 주인공이다. 다만 우리가 아는 지혜롭고 다정한 미디어 속의 따뜻한 노인이 아닌, 정열적인 마음과 정욕을 지니고는 있었으나 이제는 시간이 지나버린 청년들이라 불러야 적합할 노인들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그들을 다른 분류표로 넘겨버리는 것은 매정한 행동이다. 모든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죽음을 대비하고, 나이가 자신에게 내리는 처벌 같은 추함을 견디려 노력한다. 『알핀랜드』의 콘스턴스, 『먼지 더미 불태우기』의 윌마는 다른 인물들보다 더욱 그렇다. 거동이 불편해져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자식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몸에 냄새가 날 까봐 온갖 대비를 하고 걱정을 한다. 그 불안함과 몸단장에 대한 서술을 읽으며 ‘대체 무엇 때문에 저런 걱정을 하는가?’ 같은 생각이 필연적으로 지나간다. 그런 일들이 힘들어 양로원에 들어온 것이고, 집에 혼자 남기로 결정한 것인데 누구에게 무얼 비추며 더 이상 남의 눈을 신경 쓸 필요가 무어가 있나. 심지어 이미 그들은 무너지는 나이에 철저히 대비를 했음에도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재력도 자식도 집도 자신을 튼튼히 지탱해 주고 있는데 말이다. 그 불안함의 요인을 한 가지 집어 보자면 두 여성은 보조의 구실을 하는데 익숙하다는 점이다.

일 평생 그들은 남편(혹은 남자친구)의 보조자로서 존재해왔고,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삶은 내던진 채로 돈을 벌고 결혼 시장에서 ‘선택’ 을 받기 쉬운 전공을 공부한다. 그런 삶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다. 주체는 남편이나 남자친구로 존재하고, 스스로는 그 주위를 뱅글뱅글 돌며 그가 자신에게 집중해 줄 때만을 기다린다. (그가 다른 여성들 사이에서 오래 방황하지 않기만을 고대하며) 이는 『새빨간 지니아가 나오는 꿈』의 캐리스, 『죽은 손의 사랑』의 이레나,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세 개의 단편인 『알핀랜드·돌아온 자·다크 레이디』속 콘스언스를 포함한 조리, 레이놀즈까지 모두 그러하다. 스스로의 힘으로 설립된 자존감이 아닌 남편의 것으로 세운 당당함과 매력을 전시하려 하는 욕구가 자꾸만 치솟는다. 그것은 자기한테 있는 힘이 아니기에 튼튼하지도 아늑하지도 않다. 모래성처럼 바람에도 파도에도 흔들리다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고 만다. 이건 노인들의 이야기고 남자들의 평균 수명은 여자보다 짧으니까.


죽음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야 가짜 주체는 사라지고, 자신을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노인을 통해 나이가 든 여성으로서, 남편을 잃은 여자로서 꿋꿋이 존재할 수 있는 자기 주체성을 말하고 있다.


『루수스 나투라』와 『동결 건조된 신랑』은 조금 결이 다르다. 루수스 나투라(lusus natura)는 라틴어로 다리가 없는 염소로 태어난 동물을 두고 자연의 농담이라 칭하던 용어다. 글을 읽자마자 몇 초 지나지 않아 카프카의 『곤충』이 떠올랐다. 외견을 주력 이유로 둔 감금과 소외는 적절한 조치일까. 가족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당혹스러운 이야기지만 화자가 본인인 이상 우리는 그 본인에게 더 몰입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보호자가 가족 구성원 중 가장 연약한 사람인 엄마와 여동생이라는 점이다. 양육의 강요에 시달리며 성장한 이들이 행하는 어쩔 수 없는 배려에 기대다가 죽는 것이 소외된 자의 역할일까? 스스로 몸을 가누릴 수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까. 이런 화두가 나올 때마다 고민해보던 것이지만 지금까지도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다른 것을 배척하게 한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뿐이다. 배척을 지양하는 것이 자연스레 안된다면 모든 차별은 잘못된 것이라는 도덕적인 관념이라도 머리에 열심히 심으려 노력하는 것이 사회 안에 살아갈 인간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소양이다.

『동결 건조된 신랑』 은 다소 산뜻한(?) 마무리감을 주는 단편이다. 여름밤에 읽기 좋은 차가운 치즈케이크 같은 느낌의 글이라고 해야 할까? 창고나 골동품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괴한 창고의 모습에서 갖게 되는 반전 심리(도망치거나, 창고의 문을 열거나) 가 글에 어울리는 초조함을 준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묘사하는 여성은 위험하기도 범죄를 공모하기도, 이익에 집착하기도, 권력에 복종하기도, 남자에 매이기도 하는 등 아주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나이와 결혼의 여부도, 자녀의 존재도 그 다양함을 결정짓지 못한다. 그런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더욱 커다란 상상을 부풀릴 수 있게 해준다. 모든 이야기들의 인물들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생생하다. 일상과 적절히 섞인 매력적인 문체의 이야기들은 작가의 다음 작품도 한껏 기대하게 만든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집필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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