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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지 Mar 06. 2021

내가 놓친 의로운 순간

삶과 죽음의 경계

결혼식 하객을 싣고 지방으로 내려가는 관광버스는 새벽에 출발한다고 했다.

혼주가 마련한 관광버스에는 벌써 하객들로 붐볐고, 간단한 간식거리까지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혹시나 멀미로 인해 민폐하객이 될까 봐 은근 걱정을 했는데 같이 가는 지인들이 여행 가는 기분으로 가자며 들떠 있었다. 그때는 코로나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날이 따뜻했고 막힘없이 달리는 버스에서 바라본 풍경은 봄으로 가득했다.

걱정과는 달리 멀미가 없어서 정말 여행 가는 기분으로 들뜨기 시작했다.

신랑 신부의 첫 발걸음을 힘찬 박수로 축하를 해주고, 같이 갔던 지인들과 빛나는 샹들리에 앞에서

셀카까지 찍어댔다.

저마다 팔뚝 언저리에 붙여놓은 원색의 스티커를 내보이며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 일행은 음식의 품평을 해대며 접시에 담기 시작했다. 

접시가 어느 정도 가득 채워졌을 무렵 줄 끝에 서 있는 할머니 한분이 접시를 손에 들고 굉장히 힘겨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다지 오지랖이 넓거나 낯선 사람이 힘들어하는 모습에 달려갈 만큼 변죽이 좋은 사람도 아니었기에 할머니의 힘든 모습이 그냥 몸이 조금 불편하신가 보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접시에 음식을 담아 자리로 왔다.

수북하게 음식을 쌓아 일행 앞에 와서 보니 좀 전에 그 할머니가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계셨다.

적당히 가져온 음식 접시를 앞에 두고 기도를 하시고 계셨다.

혼주가 목사의 아들이라 그런지 하객들도 기독교인들이 많아 나는 대수롭지 않게 할머니의 기도를 무심히 흘려보냈다.

한참을 허겁지겁 밥을 먹다 쳐다보니 그때까지도 할머니는 이마를 테이블에 올리고 기도를 하고 계셨다.

나는 그때서야 할머니를 예의 주시했다. 

할머니는 이마를 얹은 상태에서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스쳤지만 다가가 말을 걸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는 할머니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지인의 말에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이내 할머니의 입가에선 침이 흘러내리고 팔이 뚝 하고 테이블 밑으로 쳐졌다.

나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의자를 박차고 할머니 자리로 뛰어갔다. 일행분들도 모두 할머니들이셨다.

할머니 괜찮으세요?라고 흔들자 할머니는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할머니의 얼굴은 백지장보다 더 하얗고 입술을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주위분들이 웅성이기 시작했고 빨리 119를 부르라는 소리가 들렸다.

내 일행들은 뛰어와서 나를 끌었다. 괜히 옆에 있다가 일에 휘말리지 말고 식사나 하라고 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웨딩홀 관계자분이 와서 급히 심폐소생술을 했고, 그러던 중 구급대가 와서 제세동기를 장착하고 긴급구호조치를 하면서 병원으로 이송이 됐다.

할머니는 몇 밤을 못 넘기고 이승을 떠나셨다고 전해 들었다. 


얼마 전 방송을 보니 번개탄을 사러 들어온 젊은 여성을 보고 기지를 발휘해 목숨을 구해준 마트 사장님의 사연이 방송에 나왔다. 

그 뉴스를 보다가 문득 몇 년 전 내가 겪었던 아니 내가 지켜봤던 할머니의 심장마비의 순간이 떠올랐다.

내가 조금 더 발 빠르게 신고했더라면 그 할머니는 잔칫집에 와서 식사 중에 유명을 달리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라는 후회와 자책감이 들었다. 아니 잊고 있었던, 잊으려 했던 일이 떠올라 괴로웠다.


나에게는 남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고 살려야 하는 전능함이 있을 리 만무하다. 

사람을 살린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내가 의사도 아니고(의사라고 해서 전지전능하지 않지만) 아무것도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의미 있을 것 같다. 

간혹, 생면부지의 사람을 위해 희생하거나 자기의 목숨을 버리고 기꺼이 누군가를 살려내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아득히 먼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가까이 붙어 있다. 


이제 4차 산업혁명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사람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코로나 시대이기도 하다.

 거리두기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괜한 일에 나서서 오히려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오해를 받는 일도 허다하다. 과연 또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나는 만사 제치고 사람을 살려내는 작은 일을 할 수 있을까?

먼저 손 내밀어 쓰러진 누군가를 부축해줄 수 있는 마음 말이다.

그럴 때를 대비해 정서적인 거리를 더 좁히고 타인을 살피고 이해해보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의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출처: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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