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보다 더 큰 행사를 치러야 하는 김장이 끝났다. 올해는 배추농사가 잘 안 돼서 포기가 풍성하지 못한 것도 있고, 김장날짜가 많이 늦어져 추운 날씨에 얼어버린 배추도 꽤나 있었다. 작년에 비해 힘든 김장이 시작되었다.
자칭 김장대표인 남편과 나는 항상 이틀 전에 시댁으로 가서 다듬고 절여 놓으면 다른 식구들이 합류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남편 회사일로 인해 목요일 절여야 하는 배추를 금요일 오후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6남매와 어머니까지 포함해서 일곱 가정에서 먹어야 하는 배추를 절이는 일인데 나 포함 여자 세명과 남자 한 명이 했다. 배추는 총 300 포기가 넘었다. 밭에서 뽑아 놓은 배추를 다듬고 자르는 일도 하루 종일 걸린다. 자른 배추를 소금물에 담근 후 큰 통에 차곡차곡 쌓고 배추 줄기에 적당량의 소금을 뿌린다. 소금양은 20kg 3포대를 사용했다. 낮 12시부터 시작한 작업은 깜깜한 저녁이 되어갈 무렵 끝이 난다. 큰 통 6개가 꽉 찼다. 새벽에 한번 뒤집어주면 간이 더 골고루 밸 것이다.
둘째 날 아침은 육수를 내서 찹쌀죽을 끓인다. 가마솥에 끓이면 좋다. 디포리, 건멸치, 건표고, 북어대가리를 넣고 푹 우려낸 육수에 불려놓은 찹쌀을 넣고 죽을 끓인다. 어떤 분들은 찹쌀밥을 해서 넣기도 한다는데 우린 긴 시간 저어가며 죽을 쑨다. 죽이 식을 동안 양파, 마늘, 생강을 손질해서 방앗간에서 갈아온다. 그동안 조카들은 씻어둔 갓, 대파, 무를 채 썰어 놓는다. 이때쯤이면 식구들 한두 명이 더 합류하긴 하지만 여전히 힘들다.
점심을 먹은 오후부터 잘 절여진 배추를 꺼내 씻는다. 배추 씻는 통을 만들기 전까지 우리는 큰 대야 4~5개를 놓고 수돗물 하나에 의지한 채 씻었는데 어느 절에서 배추 씻는 통을 발견한 후 3단짜리 통을 만들었다. (그 절은 만 포기를 하는 곳이었다) 계단식으로 네모통을 만들고 가운데 부분에 물이 흐를 수 있게 홈을 파면 맨 위 통에서 자연스럽게 물이 아래로 흘러내려간다. 맨 아랫통에서부터 씻어 올라오면 제일 깨끗한 통에서 마지막으로 헹군다. 비닐을 씌운 긴 팔레트 위에 씻은 배추를 에베레스트 산처럼 쌓는다. 3백 포기도 2시간이면 헹구는 간단한 작업이다
배추 물이 빠지는 시간 동안 준비해 둔 양념을 섞는다. 방앗간에서 갈아온 마늘, 생강, 양파를 넣고 채 썰어둔 무, 갓, 대파를 넣는다. 찹쌀죽을 넣고 멸치액젓 까나리액젓, 새우젓, 생새우를 넣는다. 마지막으로 고춧가루 60근을 풀어 넣는다. 기호에 따라 설탕을 넣기도 한다. 300 포기 배추에 설탕 1Kg 정도 넣는다. 어느 해에는 매실진액도 넣었다. 그것도 맛있었다. 성인 남자 두 명이 양념을 잘 배도록 섞어서 불려놓으면 본격적인 버무림의 시간이다. 긴 탁자 위 비닐을 깔고 대여섯 명이 둘러서 한 팀을 이루고 어머니를 포함해서 윗분(?)들은 거실에서 한 팀을 이뤄서 버무린다. 각자 통을 놓고 본인들 김치통에 정성스럽게 담아간다. 작년까지는 순서대로 담아줬다. 제일 큰형네 통부터 시작해서 막내네 통까지. 그랬더니 자기네 김치는 배추가 손가락처럼 가는 것만 들어왔더라 라는 농담반 진담반 민원이 제기되는 바람에 올해부터는 각자 통을 놓고 자기 것은 자기가 알아서 담기로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좋은 배추 선점하려는 눈치 싸움 진풍경이 벌어졌다. 간이 덜 된 배추는 마치 꽃잎처럼 살아난다.
누군가 장미꽃이라며 건넨다. 액젓이 풍겨오는 빨간 장미꽃 배추를 들어 보이며 한바탕 웃는다. 그렇게 4시간 정도 버무리면 300 포기는 끝이 난다. 마당에 널린 배춧잎을 쓸고 버무린 탁자와 김장을 위해 꺼낸 대야와 고무통을 창고에 다시 재정비해놓으면 일은 끝난다. 말은 참 쉽지만 뒷 정리하는 것도 꽤 힘들고 오래 걸린다.
갓 버무린 김장 김치에 먹는 수육이 있어서 고단함을 달랜다. 삶은 돼지고기에 붉게 버무린 김치 한 잎 쭉 찢어 목젖이 보이게 크게 벌려 한 입 먹으면 힘든 고통도 조금 사라진다. 막걸리 한 사발은 뻐근한 어깨와 뭉친 근육을 풀기에 최적의 조합이다. 올해도 막걸리와 수육을 끝으로 3일간의 김장 대장정이 마무리된다.
언제까지 이렇게 김장을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많이 힘들다. 매번 이렇듯 어마어마한 양을 하지만 매번 오지 않는 식구들도 있다. 조카들도 휴가를 내고 오라고 단호하게 말하지만 우리 딸만 해도 직장에서 프로젝트가 끝나기 전까지는 개인휴가를 내기가 어렵다. 그러니 다른 조카들이 못 온다 한들 뭐라 할 수도 없다. 6남매 부부 중 전업주부도 있지만 차량 이동 이슈 등으로 서둘러 오는 것이 쉽지 않다. 나처럼 먼저 내려갈 수 있는 상황이 되는 사람만 죽어라 하게 된다. 우리 가족 1년 내내 먹을거리니 당연히 해야지 하면서도,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오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게 마련이다. 김치를 잘 먹지 않는 집은 오히려 대기업 김치를 조금씩 사다가 먹는 경우가 더 합리적이고 맛도 좋다고 한다.
누구를 위한 김장일까.
85세이신 시어머니는 다 같이 모여 김장하길 원하신다. 그래서 아픈 몸을 이끌고 동서네 고추농사 하는 곳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가셔서 다듬고 말리는 작업을 돕는다. 고춧가루를 사는 건 안되고, 직접 농사짓기도 힘드니, 아들내외가 농사지어놓은 고춧가루를 돈 안 들이고 김장에 넣으려는 의지다. 그런 분께 김장은 각자 하겠다고 하면 마음에 큰 상심이 있을까? 그렇다고 그 많은 김장을 하는 사람만 하는 식으로 계속해야 할까. 어떤 게 합리적인지 지혜가 생기질 않는다. 시어머니가 신경 쓰지 않는 연세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지. 김장이 끝나면 내년에 절임배추 사다가 우리 집에서 나 혼자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가족단톡에 폭탄선언을 할까 싶다가도 김장시즌이 다가오면 한 가지 두 가지 김장재료 준비하기에 바쁘다.
힘든 일을 나는 왜 스스로 끊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어떤 소명이 나를 김장에 묶어 놓고 힘들어도 계속하게 만드는 걸까. 안 힘든 척, 괜찮은 척, 내가 희생해서라도 가족을 위한다는 헌신적인 마음, 이런 가면들일까?
나이 드신 부모님들이 제사를 끊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나 또한 이 김장에 사명감이라도 있는 것일까. 무엇이 이렇게 긴 세월 유지하게 만들었을까. 1년에 한 번 하는 김장이 뭐 그리 유난이냐 하겠지만 적당히가 아닌 차고 넘치는 양이다 보니 할 때마다 버겁기만 하다.
어떻게 하면 다 같이 즐겁고 행복한 김장 행사를 만들까.
이왕 하는 것 즐겁고 맛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몇 사람만 하는 김장이 아니라 모두 한자리에 모여하는 즐거운 김장 행사를 만들어가고 싶다. 작은 이벤트를 만들어보는 방법. 빨리 오는 순서대로 선물을 준다거나 경품을 놓고 행운권 추첨을 한다면 일이 아닌 행사가 되지 않을까. 김장 후 찜질방을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직도 몸으로 때워야 하는 작업이 아니라 편리한 작업대를 갖추고 좀 더 효율적인 동선을 만들어서 손발이 척척 맞게 기계화된 투자도 해야 할 것이다.
결국 김장은 포기가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먹어야 할 양식이고 김치는 매일 식탁에 오르는 중요한 메뉴 중의 하나이다. 김치를 포기한다는 것은 밥을 먹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간혹 김치를 못 먹는 사람도 있지만 한국 사람이라면 대부분은 김치가 주 반찬이다. 해외에서 거주하는 한국인들도 김치는 직접 담아먹지 않은가. 친정엄마 같은 경우는 김치 종류만 해도 한 상 가득이다. 물김치, 파김치, 알타리김치, 갓김치, 고들빼기김치, 동치미등등 이렇듯 여러 가지김치만으로도 우린 밥 한 그릇 뚝딱 먹는다. 얼큰한 라면에 잘 익은 배추김치를 얹어먹으면 환상이다. 짜파게티에 파김치를 얹어서 먹는 순간 권력이 느껴지게 된다. 오븐에 구운 고구마에 동치미 국물과 시원한 무를 아삭 베어 먹으면 단번에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우리 식생활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김치가 이 정도면 김장도 할 만 한가?
이제 2026년 김장 때까지 맛있는 김치를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다.
온몸의 근육통도 이틀째가 되니 조금씩 풀어지고, 정답 없는 김장을 끝내고 나니 큰 산을 넘은 듯 뿌듯하다. 오늘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는 분들과 김치 한 포기를 먹었다. 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게 빚은 김치를 다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내년에는 어떤 재료로 더 맛있게 할지 살짝 생각을 한다.(이 정도면 김장노예가 다 되었나 보다) 좋은 재료와 정성으로 버무린 배추김치는 내년 한 해 우리의 식탁을 든든히 책임져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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