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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르고 촘촘하지 않게

by 랑지

촘촘히 박힌 알전구가 마치 보석처럼 빛난다. 여러 개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대형 트리가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오는구나 싶다. 거대한 트리는 조화로운 구도에 맞게 장식되어 있다. 화려한 빛을 뿜어내며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다. 지하로 내려오자 원형으로 된 벽은 천장까지 가득한 책으로 진열되어 바라만 봐도 꽉 찬 마음이 든다. 군데군데 책을 읽거나 사무를 보거나 글을 쓰는 사람들의 모습마저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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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으니 할 일이 자꾸만 눈에 띄어 집 근처 카페로 나왔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좌석이 없을 정도인 곳인데 오늘은 평일이라 한적해서 좋다. 평소에 맛보지 않았던 산미가 있는 커피로 주문한다. 생각보다 훨씬 향기롭고 목 넘김이 부드럽다. 의무적인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커피 맛을 더 유혹적이게 한다. 음악소리는 간간히 내 귀에 들려왔다가 멀어지며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 대부분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하는 모습니다. 카톡도 회사 전화도 신경 안 써도 되는데, 돋보기를 낀 눈은 자꾸만 휴대폰으로 시선이 간다.


업무연락과 민원전화 응대하며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낼 때는 내 안에 날선감정들이 전투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땐 그것이 직장인으로서 당연한 것이었으리라. 여유 없고 다른 곳으로 눈 돌릴 틈 없이 살았다. 원래 한 가지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삶이 조금 지루하고 단조로웠을 테지.

한 달 전부터 그 일을 그만두고 이젠 조금 자유로워졌다. 온전히 퇴사를 한 것은 아니지만 하루 종일 얽매여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오늘 같은 무단결근도 감행할 수 있는 상황이 마치 학교 다닐 때 땡땡이친 기분이 이런 걸까.


나는 본래 조금 게으르고 촘촘하지 않은 사람이다. 잠도 많고.

미라클모닝은 쉽지 않을뿐더러 퇴근 후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것도 귀찮아한다. 가족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차리고 깨끗하게 정돈된 주방에 흡족해하면서 식탁 위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내가 좋아하는 배구를 시청하는 게 유일한 낙이라면 낙이다. 경쟁사회에서 뛰어난 사람이 되긴 어렵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부터 일을 했다. 대학 진학은 커녕 고등학교 졸업이 쉽지 않은 상태였다. 외삼촌이 운영하는 봉제공장에서 쪽가위로 실밥을 뜯고 미싱 보조일을 하며 겨울을 보냈다. 먹고살기 위해 시작된 일이었고 가족을 위해서라도 벌어야 했다. 나중에 야간대학을 가고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아 키우면서도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해왔다. 그땐 가족을 위해 무조건 일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결혼 전에는 부모님을 위해서, 결혼 후에는 내 가족과 또 다른 가족을 위해서. 장녀 장남들의 특징인 건지 가족을 생각하는 DNA가 뼛속깊이 박힌 사람인가 보다.(자랑이 아니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차려놓은 밥상에서 밥을 먹고 메이커 옷을 입으며 부잣집 딸로 살 때는 내 본성대로 살아왔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학생이었고, 멍하니 책상에 앉아 있거나 노트 귀퉁이에 낙서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았다.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고 야반도주하듯 고향을 떠나오기 전까지. 악착을 부리며 일하지 않아도 될 때까지 나는 쉬지 않았다. 일하느라 제대로 된 여행 한번 가본 적도 없었다. 여행은 사치였으니까.


요즘은 퇴직을 한 후도 여전히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퇴직을 했지만 몸과 마음이 일 할 수 있는 정신과 체력이 되고, 일하지 않고 쉬는 것을 무능력의 표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나 남자들의 경우는 더 심하다. 나와는 본성이 많이 다른 남편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건강만 허락한다면 정년이 없는 직종이라 국민연금 지급을 늦춰볼까 생각하는 사람이다. 우리 부부가 조만간 시작할 전원생활을 하더라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일을 하겠다는 계획이다. 뼛속깊이 노동의 DNA가 박힌 것 같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했는데 요즘 나는 일 안 하고 맛있는 것만 먹고 싶고 여행도 다니고 싶다. 그동안 쉬지 않고 일해온 것도 있지만 앞만 보고 살아온 나의 시간이 지나고 나니 무의미해지는 생각이 든다. 나를 위해서 살아온 날들도 기억나지 않고 누굴 위해서 살아왔는지도 남지 않는다. 지나온 시간을 얼마나 이해하고 나에게 의미를 두느냐보다, 앞으로의 내 삶에 좀 더 베풀고 투자하면서 자잘한 행복감을 성취하는 삶으로 살고 싶다. 뜻하지 않은 오늘이 있는 것처럼.


본성이 시키는대로 삶을 만들어보는 것.

가끔 일하지 않는 하루를 재밌게 만드는 것.

자잘하고 즐거운 행복감을 성취하는 것.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저당잡히지 않는 것.



"일생 동안 공들여 만든 성취, 좋아요,.... 그가 말하는 행복이란 마지막 순간을 위해서 긴 인생을 저당 잡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요. 마지막 순간에 한 번 행복해지기 위해 평생 노력만 하면서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요. 이렇게 생각하니까 행복이란 게 참 끔찍해졌어요. 나의 온 생을 단 하나의 성취를 위해 갈아 넣는 것이 너무 허무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이제 행복이 아닌 행복감을 추구하며 살아야지 하고 생각을 바꾼 거예요."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_237p

황보름소설 중에서


#현재를_누림

#간혹_땡땡이

#이제는_느긋하게

#책_더_많이_읽고_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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