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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아깝지 않게

by 랑지

그날, 햇살이 따뜻했던 11월 토요일 어느 날.

새벽공기를 가르며 도착한 미용실은 분주했다.

신부화장을 곱게 하고 결혼식장 근처에 있는 도산공원으로 야외촬영을 나갔다.

몇몇 커플이 촬영기사의 요구에 입술을 가까이하기도 하고, 어색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평생 남을 작품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그 커플 중 한쌍. 그렇게 우리는 결혼을 했다. 단풍이 깊어가는 가을이었다.


어렵게 시작했던 신혼이었던 만큼 아끼고 악착같이 모았다. 우리를 위해서는 번듯한 옷도, 해외여행도 가지 않았다. 외식도 일 년에 손꼽을 만큼이었다. 외식을 하는 것 자체를 아예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의 주말은 삼겹살 두어 근에 소주 한 병을 들고, 친정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소소하게 먹는 것이 전부였다.

어쩌다 비싼 음식이나 여름휴가를 갈 때면 부모님과 아픈 형제들이 눈에 밟히고 마음에 걸려 왠지 모를 죄책감까지 느끼곤 했다. 남편이 내게 강요한 것도 아니었고, 나 또한 남편에게 의무를 부여한 적 없지만 우리 두 사람은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의 본가에 의무를 해나갔다. 누구도 부여하지 않는 책임감과 나밖에 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어쩌면 오만한 생각이었을까.


이제는 나를 비롯한 양가의 남매들도 살만해졌다. 각자의 가정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간혹 그 시절이 그리운 건 무얼까. 어렵게 살았지만 지금보다 더 웃으며 살았던 기억이 든다.

힘들고 애쓰면서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

이번 달에 탄 보너스로 큰 아주버님 심장수술비로 보태드리고, 시댁의 전답을 고르고 창고를 짓고 시아버지의 신차를 살 때도 우리는 어김없이 모아둔 돈을 털었다.

몇 년 부은 적금을 해지해서 오빠 공장개업에 도움을 주고,

남편 몰래 티끌처럼 부은 적금을 남동생 사업자금에 홀라당 날릴 때 나는 억울했지만 내게는 매달 들어오는 월급이 있었고, 남이 아닌 내 가족에게 준 것이라 위로했다.


우리가 살던 지하방에 시커먼 쥐가 후다닥 거리며 뒤꿈치를 들고 뛰어갈 때 까무러치게 놀라는 날 위해 밤새 집안을 뒤져 쥐를 내쫓아준 남편이 있었고, 홍수로 화장실 변기에서 울컥거리는 오물이 솟구치는 날에도 남편이 바가지로 다 치워줬다. 장판을 다 뜯어서 벽에 세우고 더운 여름 보일러를 최대한 가동해서 틀어놓던 날 남편은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내게 말없이 내밀었다. 오래된 중고차를 산 후 울산 큰아버지 칠순을 축하하고 올라오는 날 저녁. 오일 튜브에 구멍이 나 엔진룸에서 김이 났다. 울산에서 서울까지 먼 거리.

그 밤에 정비소도 갈 수 없고, 나는 견인차를 부르자고 했지만 남편은 방법이 있다며 돈 드는 일을 거절했다.

휴게소에서 얻은 큰 물통으로 과열된 엔진에서 김이 오르면 10km 운행하고 정차해서 물을 채워서 엔진을 식히며 갔다. 그때도 남편은 나에게 이까짓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걱정 최대치인 나에게 닭살 돋는 멘트를 날렸다.

"당신만 옆에 있으면 돼"


얼마 전 우리 부부는 그렇게 견디며 결혼 30년을 무사히(?) 넘겼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결혼기념일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이 평범하게 보내려는데 남편은 의외로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 결혼 전 연애시절 때부터 주고받은 편지에도 살가운 멘트와 약간은 딱딱한 말투를 섞여서 쓰는 남편답게 이번 편지에도 적당히 딱딱하고 적당히 살가운 말투였지만 이전과 달리 누런 색깔의 두둑한 현금이 가득이었다.

" 아내에게

우리가 사랑하며 가정을 이룬 지 30년이 되었네

그동안 어려운 일도 많았을 텐데 서로 이해하며 잘 견뎌냈어

앞으로도 힘든 일이 있을 수 있지만 지혜롭게 극복합시다.

언제나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항상 건강관리 잘해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삽시다

사랑해."



예전과 달리 나는 이번엔 눈 꾹 감고 나를 위해 쓰기로 했다.

올겨울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게 롱패딩을 샀다. 가격텍을 만지작거리며 마지막까지도 이 비싼 걸 사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제는 나부터 먼저 챙기기로 했다.

오랫동안 길들여진 마음에 선뜻 결재가 되지 않았지만 다행히 누군가가 이 돈을 필요로 한 가족이 없다는 게 감사했다.


따뜻한 겨울이 기대된다.


#결혼기념일

#선물

#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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