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랑지 Sep 26. 2021

닫히면 열리는 곳도 있겠지

난청으로 인해 여러 가지 불편한 게 많아지기 시작했다.

전철역까지 걷는 길은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좋다.

시에서 관리하는 도로가의 이름 모를 꽃화분을 보는 것도 좋고,

공원에 피어있는 정돈된 꽃들을 보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무엇보다 좋은 건 수령이 꽤 될법한 거대한 벚꽃 나뭇길을 걷다 보면 

발걸음도 가볍다.

깔끔한 보도블록의 평평한 느낌도 좋고, 쓰레기 하나도 없이 깨끗한 도로도 참 좋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옆으로 획 지나가는 자전거와 아슬하게 부딪힐 뻔할 때가 있다.

어느 날은 아저씨가 내리더니 나를 쏘아보신다.

나는 영문을 몰라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더니 아저씨는 다시금 안장에 엉덩이를 걸치곤 

페달을 힘차게 밟고 사라졌다.

그제야 퍼뜩 깨달았다. 

아마도 그 아저씨는 힘차게 페달을 밟고 오면서 몇 번이나 따르릉 신호음을 냈을 텐데 

그 소리를 나는 전혀 듣지 못한 것이다.

고주파 난청.

매미소리, 새소리, 현관문 도어록 누르는 소리, 휘파람 소리 등 가늘고 높은 고음의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요즘엔 이어폰을 아예 끼고 다니지도 않을뿐더러 보청기를 끼고 다니는데도 

따르릉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사진출처_네이버블로그ㅡ커피향의서울여행


백화점에서 유일하게 사는 화장품 품목이 있다.

요즘엔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를 쓰니 회사에 메이크업을 하고 다니지 않는 게 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가벼운 파운데이션과 파우더는 포기할 수 없어서 꼭 바르는 편이다.

M사의 파우더를 딸아이가 권해서 3개째 쓰고 있는데 명성답게 꽤나 커버력이 좋다.

땀을 많이 흘리지 않는 편이지만 지성피부의 번들거림을 막아주는 기능이 효과가 좋다.

홈에 파묻혀 있는 것까지 송곳으로 긁어내 가루가 다 사라질 때까지 쓴 지 

며칠이 된 터라 새로 구매를 하러 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백화점은 유난히 클래식 음악소리가 쩌렁거렸고, 사람들도 꽤나 술렁거리며 많았다.

쇼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에 필요한 물건만 빨리 구매하고 가야지 라며 바로 매장으로 갔다.

돌아다니는 고객들이 많은 반면 화장품 코너는 한산했고 매장 직원은 조그만 손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다

내가 들어가자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는 필요한 화장품을 달라고 하고 바로 계산대로 갔다. 

직원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진한 눈 화장에 앳댄 20대 초반의 아릿 다운 아가씨였다.

계산을 해달라는 내 요구에 직원은 무슨 말인지 계속했다. 

나는 백색소음과 마스크 때문에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 네? 네? 거렸다.

못 알아듣는 내가 너무 답답해 내가 쓰고 있는 내 마스크를 벗길 뻔했을 정도였다.

눈치를 보니 계산대 앞에 8만 원 이상이면 어떤 샘플을 증정하고 10만 원 이상 구매를 하면 어떤 샘플이 추가되니 더 필요한 물건은 없냐는 것 같았다.

나는 이것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고 카드를 내밀었다.

그러자 또 뭐라고 말한다. 나는 그것도 알아듣지 못한다. 

직원은 눈썹을 약간 찡그리더니 옅은 한숨을 내뱉는다.

아마도 포인트를 적립하겠냐는 순서 아닐까 싶어서 휴대폰 번호를 불러줬더니 

이제는 직원도 눈치껏 번호를 눌러서 내 이름을 확인한다. 

순간 나도 모르게 보청기를 보여주면서 두 손으로 잘 안 들린다는 표시를 하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그 이후는 말이 없다.

더는 말을 해서 뽑아낼 고객이 아니라는 판단이 든 것인지, 장애인 같지 않은 장애인이라 생각해서 

말을 안 하고 넘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사진출처_해피니스님블로그


계산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저 멀리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 사람이 보인다.

미리 한쪽으로 비켜서 걷다가 문득, 뒤 따라오는 자전거가 있는지 몇 번이나 돌아보며 걷는다. 

바람에 흩날리는 벚나무의 무성한 잎들이 샤라락 거리는 것 같았다.

포로롱 포로롱 참새들이 벚나무 사이로 나와서 흩어지며 날쌔게 저 멀리 날아간다.

내 몸의 한 부분이 점점 퇴화되어 가는 것이 문득 서글퍼지는 날이다.





  

작가의 이전글 시댁은 진정 증후군 유발자인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