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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지 Oct 04. 2021

공기놀이게임

기이한 일

살면서 기이한 일이나 괴담을 겪어본 사람들이 종종 있다.

모 방송사에서 매주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귀신을 보았거나 신묘한 일을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매주 재연하여 보여준다. 무서운 이야기는 좋아하지만 유리창 흔들리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오그라드는 세상 쫄보인 나도 어릴 때 겪은 일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보다 더 친구 같은 한 살 위 언니와 늘 함께 다녔다.

언니 집은 우리 집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학교를 갈 때도 함께 갔고 하교 후에도 늘 언니랑 함께 집으로 왔다. 가방을 던져두고 언니랑 동네방네 뛰어놀았던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언니는 나보다 한 살 많았지만 골격이 꽤나 탄탄했고 힘도 셌다. 말은 별로 없었지만 얼굴은 늘 웃음기 가득한 선한 얼굴이었다. 툭하면 잔병치레를 하던 나를 언니는 늘 다독이며 챙겨줬다.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에도 방패막이되어주었고, 술래잡기나 고무줄놀이할 때는 항상 언니와 편을 먹고 언니 옆에서 살아났었다. 그런 언니가 너무나 든든하고 좋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먼저 됐지만 시험공부를 핑계로 매일같이 내 방에 와서 엄마 몰래 커피를 타 먹기도 했고, 밤새 시를 읊으며 감성적인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요즘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는 드라마 오징어게임에는 나오지 않지만 나는 공기놀이를 참 좋아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땅따먹기.

사방치기.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타고난 성격 때문인지 여러 놀이 중에 가만히 앉아서 하는 공기놀이를 무척 좋아했다.



언니와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으로 기억난다.

아마 4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은 어린이들이 걷기에는 꽤나 먼 길이었다.

우리 동네는 시내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었다.

학교 운동장을 나오면 펼쳐지는 바닷가가 있었고 왼쪽으로는 깊은 골짜기가 굽이치는 산이 있었다.

골짜기 옆으로는 독산이라고 해서 태어나서 얼마 안 된 아이가 생을 달리하면 묻는 곳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 그곳에 가면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다면서 그 길로 가지 않고 논과 벼랑길을 가로질러 가곤 했다.

논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효자 묘라는 산소가 있었고 산소 앞에는 널찍한 잔디밭이 있었다.

언니랑 가끔 그 산소 앞에서 놀다가곤 했다. 


그때도 아마 지금 같은 시월쯤이었을까? 한낮은 햇빛은 따사로웠고 우리는 학교를 나오자마자 달렸다.

달리다 보니 더웠을 것이고 효자 묘 앞에 이르러서는 시원한 소나무 그늘 아래서 쉬었을 것이다.

그리고 언니랑 나는 공기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언니가 먼저 말했는지 내가 먼저 시작했는지 어느새 

50년이 되고 100년이 되고 점점 내기가 끝이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계속 공기놀이를 했다. 그날따라 하교하는 같은 동네 아이들도 없었고, 왠지 바다도 잠잠했다.

어두워져 가고 있었는데도 우리는 말없이 공기놀이만 하고 있었다.

멀리 바다 쪽 수평선에 고기잡이 배들이 불빛을 내는 때가 되었을 때쯤이었을까? 독산 쪽에서 어떤 물체가 히끄므리 보였다. 동네 아이가 오는 것으로 생각한 나는 이리 와서 함께 공기놀이하자고 손짓을 했다.

아이는 점점 가까이 왔고 자세히 보니 우리 동네 아이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아이는 하얀 명주옷을 포대자루로 씌워놓은 것 같은 옷차림이었고 맨발이었다.

춥지 않은 날이라고 하지만 양말도 신지 않고 신발도 없이 맨발로 걸어오는 아이의 모습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언니는 계속 말없이 공기를 들어 올렸고 이번에도 50년이 추가되었다며 지금 천년도 넘었다는 말을 무심히 이어갔다. 언니는 그 아이의 존재는 전혀 관심 없다는 둥 계속 공기놀이를 해 나갔다. 나는 그 아이의 발가락이 까맣게 물들어서 아파 보였다. 내 신발을 벗어주겠다고 하자 아이는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이 없었다. 아이의 발을 들어 신발을 신겨주려고 했지만 아이의 발은 마치 콘크리트 기둥처럼 꿈쩍을 하지 않았다. 아이는 계속 땅을 바라보며 옆에 앉아 있었고 말이 없었다.

나는 아이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천천히 아래로 숙이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졌다. 사위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언니는 초점 없는 눈동자를 하고는 계속 공기를 던졌다. 나는 무서웠다. 

"언니~!! 언니!! 그만하고 집에 가자" 

언니는 손을 땅바닥에 짚고는 아무 말 없이 앞을 응시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건 아니었다. 

나는 눈물이 났다. 

"언니! 언니! 왜 그래 나 무서워! 정신 차려봐 비 오니까 얼른 집 가자"

효자 묘에서 집까지 걸어서는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가로등 없는 시골길이었고 이미 어두워져서 논길로 가서 벼랑 위를 오르는 길은 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독산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언니를 일으켜 세우고 옆을 봤다.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그대로 앉아 있었다. 

"꼬마야. 너 어디 살아? 너도 빨리 너희 집으로 가야지 응? 너 어디 살아?"
아이는 고개를 땅에 둔 채 서서히 일어나더니 왼손을 서서히 들어서 손짓했다. 그곳은 독산 쪽이었다.

"저기 산에 살아? 그럼 엄마가 걱정하시니까 얼른 가 우리도 이제 집으로 갈 거야"

아이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서 있기만 했고 언니는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평소에 언니가 내게 하듯이 팔짱을 낀 채로 언니 가방을 내 가슴 앞으로 메고 언니를 부축해 걷기 시작했다. 독산이 가까워 올수록 나는 점점 가슴이 조여오기 시작했다.

언니가 말이라도 한다면 서로 얘기해가며 덜 무서웠을 텐데 언니는 힘이 빠진 사람처럼 그냥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비에 젖은 나는 독산이 가까워올수록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뒤를 돌아보니 효자 묘 앞에 아이는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언니를 부축하고 있었지만 아이의 모습도 걱정되어 계속 뒤를 돌아보며 빨리 집으로 가라고 손짓을 했다.  

그때였다. 멀리서 자동차 불빛이 보였다. 분명 우리 동네로 들어가는 차량이다. 

나는 정신없이 손을 흔들어 차를 세웠다. 우리 동네분이 콜을 불러 들어가는 택시였다.

나는 아저씨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차에 탔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가 생각났다. 

나는 아저씨께 저기 효자 묘에 어린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도 태워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저씨는 차를 돌아 효자묘로 갔다.(그 시절엔 지나가는 차량에 손을 흔들면 마음씨 좋은 기사님이 태워주곤 했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42년 전쯤 이야기지만 아직도 그 밤, 독산에서 들려오던 아이 울음소리는 귓가에 쟁쟁하다. 

그때 공기놀이하던 **언니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우리는 뭐에 홀려 그 늦은 시간까지 공기놀이를 하며 천년만년 살아가고 있었을까?

그 아이는 왜 우리 곁에서 잠시 머물다 갔을까?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기전에 고향을 방문해드리는것이 아버지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그곳을 지나 간 적이 있다. 효자묘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바다를 바라보는 멋드러진 펜션이 지어졌고 너른 주차장에 차들만 빼곡했다.  여전히 독산은 음침한 골짜기에서 알수 없는 기가 뿜어져 나오는것 같았지만 애써 모른척 하고 지났다. 


비 오는 이 밤 그때 그 기이한 일이 문득 스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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