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랑지 Sep 23. 2021

시댁은 진정 증후군 유발자인가요?


명절이 되면 나와 남편은 퇴근 후 바로 저녁에 출발한다.

이번에는 명절 앞에 날짜가 많아 내심 일요일 오후쯤 내려가길 바랐건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남편은 금요일 오후 내려갈 채비를 한다. 먹히지 않을 거 빤히 알지만 한마디 해본다. 

"너무 일찍 내려가는 거 아닌가?"

알면서 묻냐는 듯 흘깃 나를 쳐다보며

"시골일이 지금 얼마나 많은 데  한 시 라도 빨리 가야지"

그럼 그렇지. 알면서 물어본 어리석음을 탓하며 이내 포기하고 만다.

전형적인 평화주의자인 나는 큰소리 나는 것을 싫어하고 그냥 내가 희생하고 만다는 주의다.

시골 부모님 도와주는 일이라고 하는 명분 앞에 어쩔 도리가 없지 않나.

그런데,

2년 후면 나도 결혼한 지 30년째가 된다. 그동안 말없이 남편을 따라 저질체력임에도 불구하고 

효부 노릇도 나름 선방을 했는데, 슬슬 반기를 들 때가 된 것 같다.

지금까지 잘 해왔으면 그냥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사실 그러다 보니 옆사람 귀한 걸 모른다.


남편은 일편단심 시골 농부의 아들이라 농번기며 가을걷이가 될 때면 금요일 오후에는 작업복을 들고 시골로 퇴근을 한다. 몇 번 시댁 가는 걸 거절해보았더니 혼자 내려가곤 했다.

가끔 딸아이에게 용돈으로 유혹해가며 억지 동반을 해오곤 했다.


어쨌든 이번 명절도 어김없이 토요일부터 시골일은 시작됐다.

시댁은 종교가 기독교라 차례는 지내지 않기에 음식에 대한 부담은 없어서 편하다.

26명 모여서 맛있는 걸 해 먹고 저녁이면 장작불에 갈비나 삼겹살을 구우며 재밌게 보내곤 한다.

하지만 음식에 대한 부담을 대신할 일은 농사일이다.


토요일 새벽 도착한 우리 부부는 어머님이 정성을 다해 말린 태양초를 다듬기 시작했다.

돼지 한 마리쯤 거뜬히 들어갈 만한 포대자루 가득 담긴 마른 고추를 풀어서 고추꼭지를 따는 것이다.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그동안 혼자서 하고픈 말 참았던 어머니의 이야기보따리를 들으며 하하호호 웃으며 따는 것도 1시간 2시간 시간이 점점 흐르면 슬슬 고관절이 아파오고 숙였던 고개 때문인지 뒷목이 뻣뻣해 온 몸이 뻐근해서 뒤틀리기 시작한다. 

이 집 며느리가 된 지 30년이 다되어 가는 나는 아직도 시댁에서 화장실을 제대로 못 가다 보니 시간이 조금 지나면 뱃속이 꼬르륵 거리며 가스가 차기 시작한다.

괄약근에 힘을 주며 참아보지만 쉽지 않다. 콧잔등의 땀은 고추씨의 알싸함 때문일 거라며 핑계를 대본다.


거의 24시간에 걸쳐 꼭지 따기 작업이 끝나면 방앗간에 가서 고춧가루로 빻아 주문한 양대로 나눠야 하는 작업까지 하면 마무리된다.

파란 봉지에  각자 이름을 쓴다.

"이발소 10근"

"처갓집 20근"

"김 사장 30근"

.

.

추를 대서 다는 옛날 저울을 놓고 정확히 단 후 한 대야 듬뿍 더 담아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적은 양은 아니다.

기계에 들어가 쪄서 말리는 고추와는 비교가 안된다.

장마나 소나기로부터 젖지 않게 해줘야 하기 때문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만 하는 

작업이다. 

여름 내내 햇빛에 의지해서 쉴 새 없이 뒤집어 말리는 그 작업이 파란 봉지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던 농사일은 텃밭에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열무를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은 항상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어머니는 어느새 그 열무를 큰 대야 한가득 뽑아 놓으셨다.

전날 비를 맞아서 더 싱싱하고 연해진 열무는 고추꼭지를 다 다듬은 내가 담글 수밖에 없다.

다른 동서들은 언제 올까. 대문을 수없이 바라봐도 감감무소식이다. 

수돗가의 물은 시원하게 잘 나온다. 오후의 햇살을 받아 대야의 물결은 반짝인다.

소금을 한 바가지 퍼서 연한 열무에 뿌리니 얼마 되지 않아 숨이 죽어버린다. 

밀가루 풀을 쑤고 마늘을 찧고 갖은양념을 해서 버무려놓고 한 입 먹어보니  짜다.


월요일이 되고 다 모인 시댁 가족은 왁자하다. 

내일은 밭에 남아 있는 고추를 모든 식구들이 가서 따야 한다. 

부침개는 안 해도 좋으니 가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우리 시댁은 사람이 모이면 농사일로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주변에 유명한 관광지가 있는지 조차 모른다.

밤에 와서 새벽부터 일하고 이틀 후 밤이나 새벽에 집으로 간다.


올해도 어김없이 내려가기 전부터 두통이 시작됐다.

효자 남편과 사는 동안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딸이 웃으며 묻는다.

"엄마 만약에 내가 결혼했는데 맨날 시어머니가 일만 시키고 남편은 가부장적이면 어떡하지?"

"그럼 당장 보따리 싸서 엄마한테 와."

"근데 엄마 시골 가서 산다며? 그럼 나 그렇게 일 시키는 거 아닐까?"

"당연히 도와줘야지 않겠니?"

"......."



작가의 이전글 당신은 어떤 기를 갖고 있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