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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지 Sep 15. 2021

당신은 어떤 기를 갖고 있나요?

따뜻한 온기와 활기

환승 한 번 하고 목적지까지 내리는 전철은 꼬박 40분을 탄다.

내가 타는 경의 중앙선은 평상시에는 배차시간이 꽤 길다.

출퇴근 시간에만 10분 간격이고 나머지는 짧게는 15분 길게는 20~30분 정도다.

퇴근시간 1~2분 차이가 삐끗하다가는 차를 놓쳐 20분 정도 더 걸릴 때가 종종 있곤 한다.

서울 사는 다른 직원들은 '30분 이내로 집에 도착해서 밥 먹고 산책할 즈음 나는 집에 도착한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하니 말이다.

수도권에서 출퇴근하는 나는 워나벨은 감히 꿈도 잘 못 꾸는 실정이다.

배차간격이 그렇다 보니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마주치는 사람들이 다 아는 얼굴이다.

어쩔 땐 모르는 사람이지만 반갑게 인사가 나오려고 할 때도 있다.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는 날이지만 아직은 햇빛이 따갑다.

유일하게 운동하는 코스가 전철역에서 집까지 20분 걷는 거리이다.

버스가 있긴 하지만 두어 정거장 가서 내리기도 하거니와

신호등 하나 건너지 않고 쭈욱 이어지는 코스다 보니 걷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세계명작 전집을 올해 안에 다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두꺼운 책을 가방에 들고

도시락 가방까지 들고 걷자니 오십견 오는 어깨에 꽤 무리가 가는 것 같다.

유일하게 힐링하며 걷는 퇴근길 발걸음이 어찌나 무거운지

마치 누가 나를 뒤에서 잡아 끄는 듯이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앞에 걸어오는 한 사람이 보였다.

아들과 두 손을 꼭 잡고 걷는 젊은 엄마.

나랑 20년 가까이 알고 지내온 동생이었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우리는 길거리에서 부둥켜안고 방방 뛰었다.

사실 같은 동네 살아도 거의 2달 만에 얼굴을 마주치는 거라 

너무나 반가웠다.

잠깐 사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볼일이 있다면서

아쉽게 헤어졌다.


저녁을 사주고 싶었는데 그녀는 한사코 거절을 한다.

"언니, 언니 얼굴이 왜 이래? 너무 힘들어 보여. 얼른 가서 쉬어"

'엥 내 얼굴이 그렇게 초췌해 보이나'

나는 퇴근길이라 그럴 거라며 대충 얼버무리고 헤어졌다.


돌아서 다시 걷는 발걸음은 너무나 가볍고 힘찼다.

사람과의 관계는 어쩌면 이렇게 서로 좋은 기를 주고받는 것일까?

사흘에 죽 한 그릇도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하고 걸었던 내게

그녀의 반가운 포옹이 나를 이렇게 가뿐하게 만든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걷던 내게 맛있는 저녁 메뉴를 생각하게 하고,

따뜻한 마음이 오래도록 남게 만드는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게 

정말 감사했다.

나도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누군가에게 따뜻하고 기운 나는 

반가움과 따뜻함을 전해주는 모습을 남기고 싶어졌다.


가방의 무게는 저 멀리 흘러 보내고 사뿐히 걷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어라, 나 가볍게 잘 걷네'




기운 없어 보인다는 동생의 말이 신경 쓰였는지 현관을 들어오자마자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에 나도 모르게 놀랐다.

' 저 사람은 누구지?'

염색되지 않은 희끗해지고 헝클어진 머리, 마스크로 가려지지 않는 노메이크업의 핼쑥한 얼굴빛.

눈 만 보이게 마스크를 쓰고 다녀도 생기가 없어 보이는 건 가려지지 않나 보다.


누군가에게 반가움과 따뜻함을 전해줄 시기가 올 때를 대비해서 

오늘부터 관리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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