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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지 Sep 05. 2021

사라져 가는소리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건 불편한 것이 꽤 많다.

어쩌면 외로워져가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한 여름 마지막 절정을 위해 목숨을 다해 울부짖는 매미의 울음소리.

밤새 묵은 고단함과 어둠의 찌꺼기를 씻겨줄 반가운 아침의 새소리.

나뭇잎을 쓸고 가는 바람소리

하루 종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와 내 집 도어록의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

이런 것들이 나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어느 해

남원 광한루에서 아이들과 휴가를 즐기던 때였다.

중년의 아줌마는 어색한 춘향이의 품사를 하고 이도령을 눈앞에 그려보고 있었더랬다.

아이들은 매미 울음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도저히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다며

춘향골을 떠나자고 졸라댔다.

꿈결인지 환상인지 이도령이 막 접근하려던 차에 흔들어대는 아이들 때문에

화들짝 놀라 깼지만,

시끄럽다는 매미 소리는 내 귀에 전혀 들리지 않았다.

무슨 매미소리가 들린다고 하는 거야?

식구들은 다들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굵은 나무들이 빽빽이 숲을 이루다시피 가득했다.

생각해보니 매미가 한창 울음을 울 때인 듯싶었다.

왜 그러지

왜 나는 그 쩌렁쩌렁한 매미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까?

혼자만 아득하고 아득한 세계에 빠진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내 귀에 이상이 있음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업무상 녹취가 되는 전화기를 쓰고 있었는데 

모니터 화면에 파란불이 깜빡이는 것으로 전화가 온 걸 알 수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전화기 소리를 듣지 못해 

옆 직원이 전화 왔다고 말해주면 그때서야 화들짝 놀라 전화를 받곤 했다.


그런데 희한한 건 

사람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병원을 갔다.

고주파 난청이란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나는 노인성 난청이 40대에 찾아온 것이다.

고음이나 고주파의 소리를 듣는 세포가 다 죽어있단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흔히 70대 이후 찾아오는 노인성 질환이 내게 온 것이다.

보청기를 껴야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이 나를 엄습했다.

다른 병원을 갔다.

거기서도 똑같은 진단이 나왔다.

또 다른 병원을 갔다.

병원비만 거금이 들어갔고 동일한 진단이 나왔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보청기를 맞췄다.

눈이 나쁘면 안경을 착용하고 귀가 나쁘면 보청기를 끼는 게 당연하다 는

 의사 선생님의 말은 위로가 되지 못했다.


꽤나 큰 금액을 들여 보청기를 맞추고도 나는 한동안 그 기계를 거부했다.

나는 아직 젊어.

나는 아직 없어도 돼!

하지만 점점 더 

상대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1을 말하는데 2라고 듣는 일이 많았고,

비슷한 음의 단어들을 잘 듣지 못해 

엉뚱한 대답을 곧잘 하곤 했다.

그럴 때면 식구들이나 주위에 사람들은 

답답해했고, 두어 번 반복해서 말해주다가는 이내 포기해버리고 대화에 더 이상 껴들 수가 없었다.

자막이 없는 영화를 보기도 어려워졌고,

좋아하는 연극을 보러 가면 대화의 내용을 알 수가 없어

감동도 덜했다.

회사에서도 직원들이 말할 때 입모양으로 내용을 파악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는데

그마저도 이젠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알아듣기 더욱 어려웠다.

웅얼거리는 말소리 

속닥거리는 말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주말에 날이 너무 좋아서 2년 만에 산행을 갔다.

코로나 때문인지 다들 공기 좋은 산으로 온 것일까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삼삼오오 모여서 올라가는 사람들의 왁자한 말소리.

배낭가방 어딘가에 핸드폰을 매달아 놓고 

구성진 트로트를 흥얼거리며 가는 사람들 소리.

중간중간 등산로를 벗어나 모여 앉은 사람들의 

거나한 막걸리 파티를 하는 사람들 소리.

너무나 잘 들려서 힘들었다.

말소리가 명확하게 들리는 게 아니라서 내게는 그냥 사람들 소리로만 들리는 게 참담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한 발 한 발 정상을 향해 가면서

아무 생각 없이 오르고 올라갔다.

좋은 공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그 나뭇잎이 바람에 쓸리는 소리는 비록 듣지 못했지만 

숲이 주는 상쾌한 기운이 힘든걸 충분히 보상해주었다.


사실 연극을 못 본다는 아쉬움이나 

사람들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보다 

자연의 소리를 잃어간다는 게 더욱 슬프다.

바람소리

새소리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

한여름의 매미소리

온기 없는 내 생활에 조금이나마 감성을 더해줬던 것들이 

뜨거웠던 여름이 사그라들듯 사라져 가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세상

내 귀를 막고 좀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고 품으라는 뜻 일까?

나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고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불편한 것도 꽤 많겠지만 

들리지 않으니 신경 쓰지도 않게 되고 조용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지낼 수 있는 방식을 터득해 가는 삶

그게 어쩌면 내게 주신 불행 중 다행 아닐까 싶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기억해내며 추억해본다.




-파랑새사진 출처 네이버김시흔님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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