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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지 Aug 06. 2021

님아, 그쪽으로 걷지 마오

우리 사회는 정해진 규범과 규칙이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문명인들이라면 정해진 규범에 따라서 사회생활을 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복잡한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더욱 지켜야 할 약속들이 많다.

지하철에는 경로석과 임산부석이 있고 장애인 지정석이 있어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야 한다

에스컬레이터에서는 뛰지 말고 손잡이를 잡고 서서 가야 하는 것이고, 엘리베이터는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저절로 닫히게 되어 있다.

버스도 정해진 정류장에서만 승하차를 하고, 도로의 차들은 교통 신호에 따라 움직여야 사고가 없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나 바다를 가르는 배들도 저마다 항로가 있어서 정해진 길로 다니고 약속된 신호를 주고받아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


전철문이 닫히는 순간 다이빙을 해서 열차가 지연되기도 하고, 정류장에 다가오는 버스를 빨리 타려는 급한 마음에 도로로 내려서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런 행동이 법에 저촉되거나 처벌을 받는 건 아니지만 사고로 이어질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규칙과 규범을 잘 지키면서 질서를 유지하고 살아가고 있다.

나는 매일 출근을 할 때마다 전철역까지 20분을 걷는다. 

나의 유일한 운동코스이기도 하고 그 길이 주는 즐거움은 꽤나 행복하기도 하다.

봄이면 벚꽃을 보면서 축제를 즐기고 여름에는 장미 넝쿨이 우거진 담장을 따라 상쾌하게 걷는다

가을이면 은행의 구수한 향과 노란 은행잎이 주는 감성이 꽤나 깊은 길이다.

그 길을 몇 년 동안 걷다 보니 오고 가는 사람들도 매일 마주치기도 하고 가끔 낯익은 얼굴을 보면 

인사를 할 뻔한 적도 있다.

그렇게 감사한 마음으로 출퇴근을 하던 어느 날부터 불편한 일이 생겼다.


아파트 출입구를 나와 뒷길을 걸으면 폭이 2미터 정도 될까 말까 한 인도가 나온다

따르릉 자전거를 한쪽으로 비켜줘야 안심할 수 있는 정도지만 벚나무길이라 나의 최애 스폿이기도 하다. 

그 뒷길을 벗어나면 시가지 큰 도로가 나오는데 인도 또한 꽤나 넓고 탁 트인 시야까지 확보되어 걷기에 금상첨화인 도로이다. 

지자체에서 계절마다 다리 난간에 꽃 그을 심어 놓아 색감 고운 꽃을 구경하면 걷기도 좋다

최근엔 대단지 아파트까지 입주를 시작해서 걸어 다니는 시민들은 그 전보다 훨씬 많아졌지만 그래서 그런지 더 활기찬 도로가 되었다. 

나는 되도록 맞은편에서 오는 행인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우측보행을 하지만 간혹 보면 우측보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걷고 싶은 대로 걸어오는 사람이 꽤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도치 않고 걸어오다 서로 비켜주기도 하고 우측보행에 크게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선글라스와 양산을 쓴 젊은 여성, 어느 순간 팔토시까지 입고 한치의 햇빛도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꽁꽁 싸매고 온다. 각진 서류가방을 들고 두 팔을 휘저으며 훤한 이마에 송글 거리는 땀방울도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중년 아저씨. 배꼽티를 시원하게 입고 얼음이 동동 뜬 아메리카노를 든 아가씨. 

가방에 무엇이 들었는지 정말 궁금할 정도로 볼록한 백팩을 메고도 나보다 더 빠른 걸음을 걷는 아주머니.

쓩하고 순식간에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젊은 모빌리티 운전자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주오는 사람들이나 앞에 가는 사람들을 최대한 배려하고 부딪히지 않으려고 조심해서 지나간다.


그런데, 

그중에 한 분은 지금까지 한 번도 우측보행을 하지 않는 분이 있다. 

멀리서 걸어오는 그(녀)를 발견한다. 

짧은 커트머리에 짙은 눈썹, 여름에도 통이 넓은 청바지를 즐겨 입는 걸 보면 패션감각이 남다른 것 같다.

멀리서 걸어오는 그(녀)를 발견한 나는 최대한 우측으로 바짝 붙어 서서 너울거리는 꽃잎이 내 어깨를 스칠 정도로 우측으로 붙어서 걷는다.

그(녀) 또한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걸어온다.

'우측보행이니까 가까이 와서 비켜주겠지'라는 생각은 거리가 좁혀질수록 확신이 서지 않는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배낭에 매달린 기다란 줄이 좌우로 출렁거리며 더 가까이 다가온다.

내 코앞에 도착할 때까지 나와 같은 위치에서 조금도 비키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바짝 들고서 '네가 비켜야 해, 우측보행이야.' 라며 복화술을 해보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고 뚜벅뚜벅 내 코 앞까지 걸어온다.

이러다 부딪힐까 싶을 때 결국 살짝 왼쪽으로 틀어서 쓱 지나가는 건 나였다.

기분 나쁜 패배감에 아름다운 출근길 풍경은 사라지고 뒤를 살짝 돌아본다.

목덜미에 알 수 없는 꼬리 문양의 그림이 언뜻 보였다 사라진다. 

쫄보가 된 처참한 심정에 약간 부아가 치밀지만 전철 도착시간에 맞춰 다시 빠르게 우측으로 걷는다.


복잡한 전철에 몸을 싣고 출근해 일을 하다 보면 출근길 의문의 1패는 잊어버리게 되고 다음날 또다시 그 상황을 맞게 된다. 

어느 날은 아예 양산으로 앞을 가리고 걸어봤지만 왠지 그(녀)가 다가올 때쯤 추켜든 양산으로 인해 또다시 나는 왼쪽으로 피하게 됐다.


그러다 나는 퇴근길 그분처럼 똑같이 걸어보았다.

도대체 그분은 왜 이 길을 왼쪽으로만 걷는 것일까? 

걸을 때 풍경이 달라 보이나 싶은 마음에 그 구간에서 좌측보행을 해 보았다.

꽃화분의 줄기가 바람에 슬쩍 넘실댔고 가느다란 줄기가 내 얼굴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을 뿐.

이 느낌일까?

식물과 교감하고 싶어서 일까  다리 밑에 흐르는 물을 가까이 보고 싶어서 일까 

멀리서 오는 사람의 모습이 달라 보이나 싶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제 갈길을 걸어갔다.

알 수 없었다.


나는 결코 오지라퍼가 아니다. 그분에게 규칙이나 사회규범을 훈계하고 싶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그 사람에게 자꾸만 질서에 대해 말해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기어코 그 사람에게 우측통행을 얘기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갔다. 

오늘을 디데이로 정하고 빠른 걸음으로 벚나무 길을 지나고 장미 넝쿨을 지났다. 

코너를 돌자 넓은 인도가 나오고 사람들이 오고 간다. 

두리번거리며 그분을 찾아본다.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일찍 출근을 했을 거야. 

다음날 또 마음을 굳게 먹고 걸음을 재촉하며 걸어가도 그분은 보이지 않는다.

며칠 동안 보이지 않는 그분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도 이젠 보이지 않는다.

슬기로운 규범과 규칙 생활을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없어져서 아쉬웠다.

그러나 어쩌면 그분이 이 길을 걷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겠다 싶다.

쫄보인 나는 그분이 또 그 길에 온다고 해도 절대 우측으로 다니라고 말하지 못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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