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뜬금없이 장인어른을 뵙고 싶다고 했다. 일주일 전 남편은 처갓집에서 술을 한잔 하던 중 돌아가신 장인어른이 문득 그리워진 모양이다.
코로나가 한참 기승을 부리던 2020년 3월.
아버지는 몇 개월 전부터 대소변을 못 보시더니 급기야 사람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악화가 되었다.작은 체구의 엄마가 덩치가 큰 남자를 케어 한다는 게 한계가 있었고, 자식들은 다들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결국 요양병원에 들어가신 지 며칠 만에 아버지는 쓸쓸히 떠나셨다.
나는 장녀로서 책임감도 있었고 아버지가 고향에 묻히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장례절차가 시작될 즈음 가족들과 의논을 했더랬다. 엄마는 황망 중이라 정신이 없으셨는지 모르겠다는 말만 되풀이하셨고, 큰집 사촌오빠도 사는 게 팍팍한지 이렇다 할 의견이 없었다.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몰랐던 우리남매는 장례라는 절차와 고인을 사후에 모셔야 할 곳을 고르는데 적잖이 고민이 되고 말았다.
고향 친구에게 유해를 뿌릴 만한 장소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것도 지금은 불법이라 아무 데나 그럴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수목장을 하고 싶었는데 금액이 만만치 않았고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다그치던 다른 가족들의 반대에 큰돈을 들일 수 없었다.
결국 장례지도사의 조언으로 우리는 용미리(서울시, 고양시 거주자만 가능) 공동묘지를 정할 수 있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와서 살았던 곳이 다세대 연립주택 방 두 칸짜리 집이어서 나는 돌아가신 후 묻히는 곳이라도 좀 널찍한 곳으로 해드리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두세 평 되는 땅에 100명 정도의 유해가 묻히는 곳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충격적인 모습이었는지 제대로 알아봐 주지 않던 사촌오빠는 내심 미안해하시면서 돌아가신 작은아버지께 명목이 없다시며 더욱더 눈시울을 붉혔다.
고향을 떠나온 지 몇십 년, 그동안 고향을 자유롭게 갈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사정이 아버지가 그곳을 더 그립게 했던 것일까. 말없는 아버지의 공동묘지가 꽤나 오랜 시간 나에게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양지바른 산기슭의 한 곳에 너른 잔디가 잘 가꿔져 있고 비석과 석상 등이 조화롭게 꾸며진 묘를 보면 돈이 들더라도, 가족들이 반대하더라도 저렇게 했었어야 한다고 후회가 됐다.
언젠가 남편과 함께 경기도 외곽에 있는 산으로 등산을 하러 갔을 때였다. 오르는 길에 어마어마한 넓이의 산소가 나왔다. 족히 500평은 넘을 듯 보이는 그곳은 전원주택을 몇 채를 지어도 남을 만큼의 넓이와 깔끔한 조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좋은 산소를 볼 때마다 아버지의 공동묘지와 대비가 되어 죄책감이 나를 몹시도 괴롭혔다. 자식으로서 끝까지 효를 다 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에 헤어 나오질 못했다. 선산에 몇 대 조상을 모셔놓고 내가 죽은 후 들어갈 자리까지 다 만들어놓은 시댁의 가족묘와도 더욱더 대비가 되어 나는 묘를 다시 이장을 해볼까도 생각에 이르렀다.
하지만 용미리 공동묘지의 조건은 40년 동안 이장을 할 수 없다. 40년이란 꽤 긴 것 같지만 어느덧 중년인 내 나이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죽은 후엔 더 이상 누군가가 추모하지 않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산소를 해놓고 벌초를 하지 않아 방치된 묘지가 얼마나 많은가. 해마다 벌초를 하러 가서 말벌에 쏘이고 뱀에 물리고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물론 그런 것을 감수해서라도 조상의 묘를 관리하고 추모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만, 좁은 땅덩어리의 나라에서 호화로운 산소와 관리하지 못하는 매립장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다행스러운 건 이렇게 오늘 같이 안개가 자욱한 주말에 아버지를 찾아가 술 한잔 따라드릴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쉬지 않고 5시간을 걸려 가는 고향에 모셨더라면 널찍한 자리에서 아버지는 혼자 쓸쓸히 바다만 바라보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좋은 자리와 멋진 비석과 석상에 온갖 좋은 음식을 올려놓고 절 한번 해드리고 서둘러 떠나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 굽이진 길을 올라가 아버지 나무를 쓰다듬고 그 나무 밑 그늘에 앉아서 가족들과 한동안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 가까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