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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지 Jan 13. 2021

우주를 부유하는 저 글감을 잡는 일.

글을 쓰고 싶다. 혼자서 뱉어내는 토악질이 아닌 누군가가 읽고 공감하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글을 쓰고 싶다. 나만 보는 글이 아닌 누구나 읽고 같은 이야기로 쓰고 싶게 만드는 글을 쓰고 싶다.

그런 글을 쓰고 싶은데 머릿속에 생각만 복잡하게 엉켜만 있고 제대로 정리되어 글로 나오질 않는다.


매서운 한파 끝에 펑펑 쏟아진 눈길을 방한화를 신고도 미끄러진 이야기를 쓸까?

뒤뚱거리며 장갑을 끼고 두 팔로 중심을 잘 잡고 걸어도 조금만 방심하면 바로 미끄덩하며 넘어진다.

얼마 전까지 오십견에 혹독한 통증을 겪었던 몸이라 여기서 또 통증클리닉을 제집 드나들듯 하고 싶지 않다.


집콕 시대에 맞게 집에서 해 먹는 요리에 대한 이야기를 쓸까?

나는 장금이 솜씨 버금가는 금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맛이 아주 없는 솜씨도 아니다.

가끔은 사 먹는 것보다 더 맛나게 요리도 곧잘 한다.

얼마 전엔 김밥을 쌌다. 아이들 어릴 땐 주말마다 김밥을 말곤 했는데 애들도 더 이상 집에서 만든 김밥이 먹힐 때가 아닌 나이가 되어서 집에서 싸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김밥 속에 여러 재료가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맛있는 김밥이 된다'라고 써놓고 또 막힌다. 

하긴 요즘은 사 먹는 게 더 효율적이라나 뭐라나. 그러니 더 쓸 말이 없다.


그렇다면 책을 읽고 난 후기를 써볼까 하고 얼마 전에 사 둔 책을 펼친다.

'죽은 자의 집 청소'라는 특수 청소부 이야기를 묵직하게 써 내려갔다.

죽음과 삶의 양쪽을 오가며 표면적으로 가장 더럽지만, 죽음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했던 장소.

죽은 자가 남겨놓은 흔적, 살아있는 사람이 감당 할 수 없는 오물을 처리해주는 특수한 일.

수많은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그들의 깊고 숭고한 작업.

죽은 자가 마지막까지 호흡을 했을 그곳을 살아있던 마지막 순간으로 되돌려 놓는 일을 하는 

특별한 직업 이야기다.

죽음으로 모든 것을 마감하려 했던 자는 제 몸에서 나온 유충과 썩어가는 액체로 마지막까지 이생에 남기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떤 사명이 있어야만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 직업이니 돈과도 연관이 있겠지만 꼭 그리 단순한 것 같지 않다. 

이것도 너무 무겁고 속이 뒤집힐 글이라면 또 뭐가 있을까.


그렇다면,

긴 투병 끝에 먼길 떠난 가까운 이의 장례식 이야기도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글이 되겠지?

오랜 항암치료에 체력도 약해지고 독한 약에 사람을 더 알아보지 못한 순간이 되었다고 한다.

온몸으로 퍼진 암은 걷기 조차 힘들었고 그렇게 몇 달을 누워 지내다가 그만 먼 길 떠나고 말았다.

떠나고 난 후에도 아직 살아 있는 그녀의 카톡 프로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가족들과 단란했던 여행지의 사진으로 꽤 많은 프로필 사진을 천천히 넘겨본다.

항암치료로 빠진 머리를 적당히 감추기 위해 쓰고 다닌 꽃무늬 두건이 눈시울을 붉게 만든다.

햇살에 찡그린 맨 얼굴, 코 밑에 걸린 안경, 패션디자인 전공자 출신 답지 않은 수수한 의복들이 

언니의 성품을 말해준다. 

부디 고통 없는 곳에서 편안히 영면하길 바라는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내리려고 준비하는 전철 안에서 남편의 전화가 온다.

집에서 20분 거리에 내장탕이 유명한 곳이 있다며 먹고 싶다고 한다.

그래 산 사람은 먹어야지.

나는 내장탕이나 순댓국을 그다지 즐겨하지 않아서 딱히 먹고 싶지 않지만 짠돌이 남편이 이런 날도 있나 싶어서 흔쾌히 따라간다.


밥을 먹으니 역시 머릿속은 단순해지고 배부른 포만감에 이내 졸음이 쏟아진다.

글쓰기는 마중물을 더 부어야 써질 듯싶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늘 내 등뒤에 붙어 있는 것이라고 한다.

오늘, 지금 이순간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내일이면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지만 내 곁에 항상 그것이 도사리고 있다.

삶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마음이 든다.


죽음과 맞닿아 있는 우리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린 그 위태로움을 강하게 이겨내고 걸어간다.

더 많이 사랑하고, 

조금 더 많이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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