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열 손가락도 채 되지 않을 만큼의 제주 여행 중 기억에 남는 두 편의 여행이 있다. 10여 년 전 회사에서 단체로 한라산을 등반한 적이 있었다. 정확한 년도는 기억나지 않고 1월 8일이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제주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9시. 전날 폭설이 내렸다는 일기예보 와는 달리 눈 위로 반짝이는 햇살이 우리를 반겼던 아침이었다. 윗세오름을 목적지로 두고 성판악코스로 길을 잡았다. 총 10명 정도 출발을 했는데 윗세오름까지 도착한 사람은 4명이 전부였다. 윗세오름까지 몇 미터 남기고 기상악화가 된 이유도 있고 중도에 포기한 이들도 있었다. 변화무쌍한 제주의 날씨를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산을 오르는 힘듦보다 살면서 그렇게 많은 눈을 본 적이 없기에 신기해서 동영상을 찍으며 신나게 올랐다. 오후 3시쯤 되어서야 예약해 둔 회센터에 도착했고 그날 첫끼로 먹었던 싱싱한 회맛을 잊을 수 없다. 나니아 연대기라는 영화를 보고 그때 제주의 윗세오름길이 떠오르며 눈 덮인 한라산은 꼭 다시 가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겨울의 한라산이 내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면, 한여름 제주 중산간의 고요함도 잊을 수 없는 여행이었다. 모임을 통해 친하게 된 언니가 있는데 고향이 제주였다. 때마침 제주여행을 계획했던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언니 친구분이 고향에서 살고 있었다. 전원주택을 지어 펜션처럼 운영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전문적으로 펜션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저렴한 숙박료를 지불하고 2박을 하게 되었다.
제주 하면 바다가 떠오르고 숙소를 고를 때도 두말할 것도 없이 오션뷰를 일 순위로 생각하던 때라 한라산 중턱에 있는 마을이라는 게 썩 내키지 않았지만 렌터카로 언제든 바다로 달려갈 수 있다는 생각에 주저 없이 그곳을 선택했다. 제주에 도착한 시간은 늦은 저녁이었다. 렌트한 차량의 주유를 하고 중산간으로 목적지를 누르니 제주시에서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고 나왔다.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한 시각이라 편의점에서 몇 가지 요깃거리를 샀다. 지금 생각해도 그건 잘한 일이었다. 중산간 마을에 도착한 때는 10시가 조금 안된 시간이었지만 어디에도 상가를 찾지 못했다. 유명 관광지의 휘황한 불빛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어딜 가도 인적이 드문 중산간 마을을 찾아가는 그 밤길은 내 심장을 쫄깃하게 했다. 게다가 우리가 묵을 숙소의 주인은 서울에 볼일이 있어 집은 비어 있었고, 동생이라는 분이 열쇠를 건네주고 떠났다. 칠흑같이 어두운 사방은 고요했고, 가끔 지나가는 바람소리만 흔적 없이 사라졌다. 두 딸과 함께 호기롭게 떠나왔던 여행이라 쫄보처럼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겁나게 무서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커튼을 닫고 바닥에 누웠는데 땅바닥에서 5센티미터 정도 공간이 띄워졌다. 그 틈으로 드넓은 마당 뒤로 보이는 검은 숲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딸 손을 잡고 잠을 이루지 못했던 첫날밤이었다. 그 이튿날도 나는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숙소로 돌아와 캔맥주와 마른안주를 씹으며 티브이를 보니 제주까지 와서 이러기냐고 딸들은 잔소리를 퍼부어댔었다.
최근에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한강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제주 중산간 마을에서 치매에 걸린 노모를 모시고 살던 인선은 공방에서 작업하던 중 사고로 손가락이 잘리고 수술을 위해 서울의 대형병원으로 급히 이송된다. 키우던 새가 3일을 견디기 어려우니 제주로 가서 물과 먹이를 주라는 부탁을 받고 인선의 친구인 경하는 그곳으로 간다. 내가 키우는 새도 아닌데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까 싶었지만 경하는 그곳으로 간다. 그곳은 한번 눈이 내리면 며칠씩 고립되는 마을이었다. 작은 새 한 마리의 목숨을 위해 눈보라가 몰아치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을 헤쳐서 밤길을 간다. 새를 구하기 위해.
중산간 마을.
1948년 4월 3일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시뻘건 봉화가 타오르던 곳. 무고한 제주도민들의 희생이 일어난 곳이었다. 산속의 조그마한 토굴마다 사람들은 숨었고, 가장 강하지만 가장 연약한 목숨들은 이유 없이 희생되었던 곳이다.
제주가 좋아서, 모처럼 딸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라, 저렴한 숙박비에 꽤나 훌륭한 숙소였기에 그냥 잠시 머무르며 관광을 하려던 생각뿐이었다. 그 마을을 걸어보지도 않았고, 그곳이 어떤 사연이 있었던 곳인지도 알지 못한 채 고립된 마을처럼 느껴지고 두려웠던 것이다. 누워서 바라보던 마당 저 멀리 입을 벌린 채 어둠을 품고 있던 숲 속이 그저 무섭게만 느껴졌고, 인적 하나 없던 그 돌담길이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었다.
소설을 읽다 보니 제주를 여행할 때의 그 마음이 오버랩이 되면서 그곳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눈 쌓인 한라산 중산간마을에서의 고립은 어떤 느낌일까. 누군가 문을 흔들어대는 것 같은 바람의 덜컹거림을 밤새 견뎌야 하는 걸까.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가지가 꺾여버리는 것처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오게 될까.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p310
작별하지 않는다 라는 책은 읽는 내내 조금은 힘들었다. 주인공의 편두통이 오롯이 느껴졌고, 새를 살리기 위해 폭설을 뚫고 산길을 걸어야 하는 힘든 여정이 두 번째로 힘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때 이유 없이 죽어간 영혼을 잊고 있어서 마음이 아팠다. 모든 것들을 너무 가볍게 바라보는 세상 속에서 비록 작은 새이지만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느꼈고, 또한 생명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 제주를 간다면 잊었던 영혼들을 기리며 그들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다.
#제주43
#중산간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