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에도 김장을 하러 또 내려가면 내가 성을 간다 갈아"
"이번에도 400포기 넘게 하면 이젠 당신과 이혼이야"
라며 되지도 않는 으름장을 놓곤 하는 나는 매년 김장을 4접 이상 한다. 물론 나 혼자 하는 건 아니고 시댁 모든 가족이 모여서 한다. 김장 대표인 남편이 일정 조율과 총대를 메고 가족 단톡방에 1년 전부터 공지도 올리고 참여를 권한다. 조카들도 예외가 없다. 1년 먹을 김장을 하는 이 날을 제2의 명절이라는 확고한 의미까지 부여해서 가족 모두 모이게 끔 해 놓는다. 물론 간혹 피치 못할 일이 있어 빠지는 사람도 있고, 피치 못 할 일이 매년 생기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김장 때가 되면 며칠 전부터 괜히 예민해진 탓인지 먹히지도 않을 잔소리를 나 혼자 퍼붓곤 한다. 이번 김장을 끝으로 내년부터는 절대로 김장을 안 하겠다고 선언해보지만 남편은 꿈쩍도 하지 않고 수산물 시장에서 물 좋은 생새우를 사다 놓고야 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혼해서 처음부터 김장을 하러 간 건 아니었다. 그땐 시어머니도 젊었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돌아가면서 김장 품앗이를 했던 풍습이 있었기에 굳이 자녀들을 불러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처럼 많은 양을 한 것도 아니었고, 손끝이 야무진 어머님들은 일도 척척 잘 해내셨던 것이다. 그러던 시간들은 흘러 어느 시기가 되니 자연스럽게 자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품앗이를 한다고 하지만 그 많은 일들을 다 품앗이를 하는 것이 아니기에 부모님 두 분 몫이 되곤 했다.
김장의 시작은 봄이다.
고추 모종을 심는 것부터 시작한다. 고추를 따서 말려야 고춧가루를 만들기 때문이다. 한 여름 뙤약볕과 긴 장마를 잘 견딘 고추를 빻아 놓고 가을배추와 무, 갓, 대파, 쪽파를 심는다. 그리고 정성을 들여 물을 주고 길러내면 400포기가 넘는 배추가 튼실히 자란다.
결혼 전에는 농사라고 지어본 적이 없던 나는, 잘 익은 열매나 토실한 농작물을 볼 때마다 농부의 마음이 이런 것이겠구나 하며 섣부른 보람을 느끼곤 했다. 한 달에 한번, 농사짓는 시댁에 가서 논밭을 둘러보는 것으로 내 할 도리를 다 한다고 생각했던 게 전부였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컷을 무렵 본격적인 김장 명절이 시작되었다. 그때도 직장을 다니고 있던 터라 주말에 내려가 겨우 배추를 버무려 하룻밤 자고 올라온 기억이 난다. 그러던 김장은 해가 거듭될수록 참여하는 가족이 늘어나고 배추의 양도 늘어나다 보니 김장은 해가 갈수록 힘에 부쳤다. 어느 해는 500포기가 넘었다. 밤 12시가 되어도 끝나지 않아서 결국 남은 배추는 보관창고에 저장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몇 해전부터 귀농해서 전문적으로 농사를 짓는 시동생이 배추를 심었다.
"형수님 모종은 400개 심긴 했는데 죽거나 병든 것들 빼면 380개 정도 될 거예요."
하~!! 그래도 300개가 넘다니 정말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갈수록 꾀가 나고 어떻게 하면 편하게 할 수 있을까만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니까. 시댁 6남매 김장은 객관적으로 따지고 보면 300포기 정도면 충분한 양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신념은 내 땅에 지은 농작물을 자식들에게 주는 게 삶의 전부이기에 양껏 심어서 많이 해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자식들 냉장고에 김치를 가득 채우고 땅에 물어놓은 항아리에 담아놓고도 남으면 어머니에게 평소 마음을 나누셨던 사촌들에게도 한 박스씩 택배를 보내곤 하신다.
시동생 부부가 밭에서 배추를 따서 절여 놓으면 나와 남편이 내려가 나머지 재료를 준비한다. 새벽에 일어나 절인 배추를 뒤집고 나머지 채소들을 손질하기 시작한다. 넓은 마당에 펼쳐진 파와 갓을 다듬고, 무 채를 썰고, 찹쌀죽을 가마솥에 끓인다. 그러면 나머지 가족들도 속속 도착해서 김장행사의 작업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아버님이 살아계실 땐 몇 날 며칠 동안 마늘을 까셨는데 이젠 마늘은 사기로 했다. 점심을 대충 먹고 절인 배추 씻는 작업을 한다. 헹굼은 총 4단계를 거쳐 씻는다. 이젠 다 큰 조카들이 씻고 나르는 작업을 도와주니 별로 힘이 들지 않는다. 다른 때도 그렇치만 집안에 행사가 있을 때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것을 우선 하기에 조카들도 김장에는 무조건 참여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길들인 효과인가?
중간중간 농담도 하고 힘들 땐 앞산의 단풍을 바라보며 한 번씩 쉼을 갖기도 한다. 배추를 씻어 먼지가 들지 않게 포트 위에 비닐을 깔고 씻은 배추를 쌓는다. 씻어놓은 배추가 산처럼 높게 쌓이면 일은 절반쯤 끝나는 셈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 밥을 먹고 배추 속에 들어갈 양념 만드는 작업을 한다. 어른 한 사람쯤 들어가 누울 수 있는 큰 다라이(대야) 두 개에 나눠서 버무린다. 무채에 고춧가루를 조금 넣고 버무린 후, 갓, 대파, 찹쌀죽, 젓갈, 새우젓, 생새우, 마늘, 생강, 매실액을 넣고 버무린다.
결전을 앞둔 용사들처럼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배추 한 포기 한 포기마다 정성을 다해 속을 넣기 시작한다.
식구가 많아 두 군데로 나눠서 배추를 버무리면 두어 사람은 김치통을 갖다 놓거나 다 채운 김치통을 정리하는 일을 한다. 김장은 준비과정이 정말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려서 그렇지 속을 넣는 일은 일사천리로 끝난다. 저마다 자기네 김치통 순서가 올 때면 속을 더 많이 넣으라는 둥, 좋은 배추를 골라서 담아 달라는 애교 있는 주문을 하며 웃다 보면 어느새 김치 버무리는 것도 끝이 보인다.
올해는 400포기가 조금 안돼서 그런지 3일째 점심 이후에 작업이 다 끝났다. 배추김치만.
이후에는 파김치와 알타리 김치를 담기 위해 씻고 버무려야 김장의 대장정은 끝이 난다.
'또 시골 가요? 힘드시겠네요'
매번 시댁에 일이 있을 때마다 연월차를 쓰는 내게 직원들은 안타까워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고추며 가지 모종 등등 여러 가지 모종을 심는 농번기 때마다 휴가를 내고 시골을 가니 그런 말을 할 만도 하다. 때로는 나도 힘에 부칠 때도 있다. 안 해본 농사일이라 숙달되지 않아서인지 시골을 다녀오고 나면 온 몸이 쑤시고 아프다. 오히려 주말이 끝나고 월요일 출근하면서 회사에서 쉰다는 느낌도 들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몸은 고되지만 마음은 편하니 그것으로 됐다.
올해도 어김없이 김장은 맛있게 잘 됐다. 배추김치는 내가 딱 좋아하는 맛으로 간도 적당하고, 고춧가루의 칼칼함과 태양빛을 받아내서 그런지 김치의 자태는 가히 품격마저 느껴지게 한다. 실처럼 가늘어서 한 포대의 쪽파는 조카들이 12시간 이상 까서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짜파게티와는 환상궁합이 될 정도로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가을무는 인삼과도 안 바꾼다고 하는데 어머니께서 정성 들여 키운 총각무의 아삭함과 달큼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새콤하니 내 입맛을 자극시켜준다. 일 년 동안 이 맛있는 김치를 먹을 생각하니 든든하다. 사 먹는 김치도 맛있긴 하겠지만 모든 재료를 내가 직접 키우고 만들어서 해 먹는 김치의 맛은 평가를 따질 수 없을 것이다.
김장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도 오래 걸릴 뿐 아니라 혼자 할 수도 없고, 또 혼자 해서도 안된다. 여럿이 함께 어울려서 해야 한다. 우리 가족이 언제까지 6남매가 모여서 김장을 할지 모르겠다. 수육을 먹으며 내년부터는 각자의 가정에서 개별적으로 하자는 이야기를 해보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못내 서운하신 눈치다. 그리곤 조용히 말씀하셨다. "나는 죽을 때까지 니들 먹을 거 해주고 싶다."
김장을 끝내고 며칠 후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김치 맛이 어떠냐? 나 너한테 치사 좀 들을라고 전화했다."
"어머니 김치 맛이 완전 따봉이에요."
"니들이 했으니 어련히 맛있겠냐, 난 이제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힘이 없어서 김장 못하겠다."
"에이 어머니가 다 해놓지 않으셨으면 우리가 못하죠 어머니 감사해요."
"나는 옛날 사람이라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이라곤 자식들밖에 모른다. 죽는 날까지 이렇게 살다가 죽을랑게 농사짓지 말라는 소리는 하덜 말어~"
"알았어요 어머니 그런소리 안 할게요.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버무린 배추 김치에 푹 익힌 수육 한점 올려서 먹는 맛은 우리 삶이 주는 행복이 거창한 것보다는 그런 일상에서 오는 소소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배추 김치 한 포기 꺼내서 먹어본다. 이번 김치 맛을 보니 아무래도 이혼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내년 김장하는 날도 올해처럼 포근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