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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지 May 07. 2023

길을 잃었을 때 자유함이 시작된다.

아직 비닐도 채 벗기지 않은 고급가죽 시트는 푹신했고 차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출고된 지 두어 달도 안된 고급 세단을 타고 여자 넷은 그렇게 설렘을 가득 싣고 영월로 출발했다. 출발할 때는 꾸물거리던 날이 강원도의 어느 휴게소를 지날 때부터는 환하게 봄햇살을 비추고 있었다. 모처럼 모인 여자들은 일상을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가벼운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봄 꽃을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감탄사를 질러댔다. 차창밖으로 빠르게 지나는 봄의 산속은 연둣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고, 가지런히 빗질을 해놓은 듯한 논밭은 농부들의 바쁜 일상을 보면서 시댁의 농사일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애써 모른척하며 모처럼 여행을 즐기기로 했다.

멤버 중 한 명이 얼마 전 새로 등록한 매끈한 신차

저마다 밥벌이도 다르고, 나이도 다른 네 명의 친구들은 2005년도 처음 만났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은 아이들을 키우고 바삐 사느라 여행을 간다는 건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이제야 숨을 고르듯 여행의 계획을 하며 다니기 시작했다. 코로나 때부터 남편과 산행을 시작한 언니는 블랙야크 100대 명산 완등을 해서 인증서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이번 여행의 코스는 백대명산을 완주한 언니가 계획했다. 바로 일주일 전 다녀온 영월의 백운산이었다. 백운산의 할미꽃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그런 풍경이나 볼거리도 잠시 언니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등산을 일 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적잖이 걱정이 되는 계획이었다. 

칠족령 전망대에서 보는 동강

나는 출발하기 일주일 전부터 회사계단을 오르며 다리 근육을 단련시켜 봤지만 그것만으로 산행이 쉽지 않을 것이란 건 불 보듯 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까지 완등하는 건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에 정상은 포기하고 칠족령을으로 방향을 잡고 산허리를 돌았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길은 힘들지 않고 트레킹 하듯 걸어갔다. 봄이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백운산줄기는 곳곳에서 야생화며 봄꽃의 향기가 헐떡이는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바람이 불면 산속 깊은 곳에서 퍼저나 오는 풀잎향기들이 마냥 들뜨게 만들었다.

칠족령의 전망대는 동강의 굽이치는 물결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코스였다. 좌로는 백운산의 산길이 품어주고 우로는 동강의 시원한 강물이 땀방울을 식혀주었다. 길가에 핀 작은 들꽃을 혹여라도 밟을세라 조심조심 걸으며 눈에 담고 또 카메라에 담아 가며 급하지 않게 사부작거리며 산길을 걸었다. 간단히 준비해 간 간식을 먹으며 동강의 하늘벽구름다리 쪽으로 코스를 잡고 비경을 감상한 후 다시 원위치를 할 예정이었다. 나는 급한 산행은 하지 못해 두 명은 앞서서 갔고 백대명산을 다녀온 언니는 나를 배려해 주며 천천히 걸었다. 중간에 갈림길을 보니 앞에 두 명이 하늘벽구름다리로 제대로 간 건지 확인이 되지 않았다. 깊은 산속이라 휴대폰 연결도 안 되고 소리를 질러봐도 앞선 사람들은 대답이 없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그들이 내려갔을 방향으로 걸어 내려갔다. 


올라온 방향과 반대되는 그 길은 거의 90도 방향으로 수직이었다. 온통 바위투성이었고 발을 헛디뎌 삐끗할 경우 발목이 접질릴 수 있다는 생각에 조심 또 조심하며 걸었다(아니 거의 사족보행이었다). 중간중간 굵은 밧줄이 있어서 사고 없이 무사히 내려왔다. 제장마을까지 내려가 지도를 보니 우리가 주차해 놓은 곳과는 아주 가까웠다. 

제장마을어귀에 있는 거대한 사과나무 과수원에는 하얀 꽃이 눈이 부시게 피어 있었다. 터벅터벅 걷던 우리는 마을 안쪽에 작은 카페를 발견했다. 목도 축일 겸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한잔씩 시키고 주인장께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말했더니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목이나 축이고 좀 앉아서 해결책을 찾아보자는 거였다. 그때부터 뭔가 일이 심상치 않음을 알게 됐지만 여행이란 또 계획하지 않은 대로,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도 묘미 아니겠는가. 돌아갈 방법은 뒷전이고 동강이 굽이치며 흐르는 기암적벽을 바라보며 거센 물결에 그런 걱정쯤이야 라며 흘려보냈다. 이리저리 뛰어놀다 온 우리를 보신 카페주인장은 우리가 가려는 주차장은 위치상으로는 가까운 곳에 있으나 강이 있어서 그곳은 바로 갈 수 없고 넘어온 산을 다시 넘어가거나 택시를 불러 빙둘러서 가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다. 절벽 같은 그 산을 내려왔는데 다시 올라가는 건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택시비를 지불하고 40분을 달려가는 수밖에. 

하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면 재미가 없지. 택시가 그 마을까지 오게 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택시도 안 오고, 산을 다시 타기도 어려운 진퇴양난이었다.  누구는 내려가는 건 잘해도 올라가는 건 자신 없다 했고, 누구는 빙 돌아서 걸어가자고 하고, 누구는 그냥 여기서 1박을 하자고 했다. 

옆에서 기타를 치며 나훈아의 사나이눈물을 구성지게 부르던 카페 주인장은 해 질 녘이 되어 손님이 없으니 본인이 일일 택시 운전기사를 하겠다고 나서주셨다. 낯선 여행길에 지치고 피곤한 때에 좋은 분을 만난 우리는 행운이었다. 자가용 택시를 타고 백룡동굴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좌로 흐르는 동강의 물줄기만큼이나 구불구불거렸다. 카페 주인장의 구성진 트로트를 시작으로 차 안의 네 명의 여자들은 트로트로 대동단결! 시원한 강바람 또한  답답한 속을 후련하게 해 줬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벌써 어둠이 내렸고 고마운 택시 기사님께는 얼마간의 기름값과 저녁식사로 고마움을 표했다. 


나는 낯선 길에 대한 두려움이 많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여행지를 갈 때면 꽤나 긴장을 하곤 한다. 먼 여행길을 돌아 집과 가까이 올 때쯤이면 안심을 하게 되고, 그때쯤이면 울렁거리던 멀미도 멈춘다.

여행을 떠나는 것은 낯선 곳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도 있을 것이고, 일상에서 찌든 삶을 새로운 환경을 보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여행을 자주 하지 않는 편이기에 계획한 코스대로 진행되지 않을 경우 불안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번 여행의  작은 에피소드는 내 생각을 많이 바뀌게 된 사건이었다.

원래 가려던 곳을 못 가고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는 두려움도 극복이 되고, 또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도 느끼게 되었다. 낯선 길만큼이나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꽤 컸던 나에게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되었다. 길을 잃을 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라고 했던가! 새로운 길, 낯선 사람들 모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속한 선한 존재 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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